무너진걸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상황을 왜곡하여 인지한다. 한순간 끝날 수 있는 의미없는 부정적 상황을 일반화 하여 자신의 삶 자체가 실패할 것이라고 믿거나, 근거 없이 세상을 양분하여 자신이나 자신이 처한 환경을 끝없이 부정적인 방향에 몰아넣는다. 물론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들도 가끔씩 이렇게 왜곡된 인지를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생각을 하든 무조건 부정적으로 생각이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자동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첫 입원 직후 만났던 상담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생각이 꼭 흐르는 물길 같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방향으로 물길이 트이기 시작하면 수량은 점점 많아지고, 물길은 더 깊고 넓어진다. 그럼 본류로 가야하는 생각들이 자꾸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울증 치료는 잘못 트인 물꼬를 막고 물의 흐름이 본류로 흐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 나는 확실한 호전을 겪었다. 물의 흐름을 막았고 물길이 지나간 흔적 금방내 사라지진 못하더라도 언젠가 마를 것임을 믿었다. 본류의 수량이 늘진 못해도 언젠가 다시 단단히 차오를 것을 믿었다.
그 믿음은 만용이었을까? 며칠 전 외출에서 돌아온 직후, 외투를 걸기 위해 옷방에 들어갔다. 창문 하나 없이 수많은 옷들로 가득찬 옷방은 아주 어두웠다. 눈 앞을 가린 듯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눈에 익지 않는 막막한 어둠이 반가워서, 서러워서 한참을 서 있었다. 목이 쉬고 턱이 아팠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울증 치료는 보통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천천히 진전되는 모습을 보인다는데, 나는 너무 상승만 해와서 내심 불안함을 느끼긴 했다. 그래서 하강의 시기를 대비하고 또 대비해왔다. 그 대비는 얼마나 쓸모 없었나. 결국 또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
물길을 막았다고 믿었던 둑은 무너졌고 나는 내 인지 왜곡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아직까지는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 왜곡된 것, 내가 병증에 의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알 수 있을까. 나는 또 나를 의심하고 사람들을 의심하고 누구도 믿지 못한 채 불안만 끌어안고 살게 될텐데. 그렇게 된 후엔 나는 또 스스로를 해할 것이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겠지. 이 모든 걸 견딜 수가 없어서.
열흘 뒤면 진료일이 온다. 그 앞에서 솔직할 수 있길. 다른 방법들 중에 나를 위한 방법이 또 하나쯤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