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안 고마웠지만 이제라도
고등학교 삼학년 때였다. 나는 고삼이라는 특권을 십분 활용하여 엄마의 신용카드를 들고 야자 시간마다 나가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노래방에 가던 나이롱 입시생이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내내 공부를 한 기억이라고는 탐구 과목 정리를 했던 나흘과 국어 문제집 한 권을 풀었던 사흘, 다 합쳐 일주일뿐이었으니 보통 말하는 나이롱보다 더욱 나이롱, 주변 친구들은 내가 당연히 대학 입시를 치르지 않을 거라고 믿을 정도의 나이롱 입시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명했다. 비평준화 지역의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학교 분위기상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은 학생은 거의 없었다. 진지하게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맨날 공부는 안 하고 놀 생각만 한다는 게 눈에 띄게 보였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특정 과목에 점수가 잘 나오는 편이어서, 나머지 과목은 7, 8등급이 나오면서도 그 과목 하나는 자주 만점을 받았고 한 과목이지만 전교 등수를 언급할 때 이름이 나오기도 했으니 그 때문에 더 유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천진했어서, 적어도 한 과목만큼은 공부를 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이 나온다는 걸 자랑스러워했으니, 백백 재수 없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학교에 돌았던 나에 대한 소문들은 다른 학생들을 즐겁게 하기에 적절했다. 걔 있잖아. 그 시끄러운 애. 걔가 동성애자래. 얼마나 욕하고 물어뜯기 좋았을까. 하긴 물어뜯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소문을 감당하기엔 너무 유약했다. 소문은 퍼지고 퍼져 열 두 개 반에 있는 각각의 친구들에게 소문의 내용을 되물을 쯤엔 이상하게 곡해되거나 덧붙여진 이야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소문의 근원을 찾기 위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때, 나를 싫어할 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한때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부정적 말이 덧씌워졌다는 걸 알았다. 반면 소문을 수습해준 건 친하긴 했지만 나와 거리가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걔 그런 거 아니야. 나 걔랑 친하잖아. 한 손으로 꼽히지 않을 만큼의 머릿수들이 수습을 해준 덕에, 아니면 수능이 목전에 다가와서, 소문은 더 커지지 않고 가라앉았다.
가깝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생각보다 먼 사람이었다던가, 멀다 믿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사람이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단순하게 어떤 사람들은 나빴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보다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내 소문을 수습해준 사람들을 신경 썼다. 소문을 무마해준 건 고마웠지만, 정말 고마웠지만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나는 나를 돕기 위해 친구들이 했던 말이 결론적으로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는 게 슬펐다. 수능이 끝난 후에야 나는 친구들을 모아 말했다. 너희가 무마해준 건 고맙지만 그 소문은 사실이라고,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친구들은 내 말을 듣고 깔깔 웃었다. 야, 너 숨긴 적도 없으면서 우리가 모를 거 같았냐. 그 친구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내가 상처받는 걸 바라지 않아 거짓말로 무마해준 것뿐이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내색 한 번 하지 않은 것도, 사실 여부를 떠나 나를 위해 행동한 것도 모두 고마웠다.
수능이 끝났다. 수능 끝난 고삼들은 자기들끼리의 들뜨고 재밌는 일에 빠져 소문이 있었다는 건 전부 잊은 듯 다양한 많은 일들에 즐거워했다. 나 역시도 입시생이었기에 대입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즐거워했고, 순식간에 사라진 소문에 이 일들이 끝났다는 안도감도 얻었다. 그때 내게 위로를 하겠다며 다가온 친구가 있었다. 친밀함보다는 애틋함이 더 앞서는 사이.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 겨울이었다. 동네 수학 학원에서 만나 같은 중학교에 간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는 해까지, 우리는 매년 초봄이면 반배치표를 보며 올해는 과연 같은 반이 될 수 있을까 설레어했다. 매년 불발이 이어지다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어서야 같은 반이 되었지만, 우리는 5년의 시간을 거치며 각각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익숙해져 있었기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 애틋했다. 함께 어울리는 무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도, 자주 따로 만나 서로의 고민을 나누곤 했다. 아니, 서로의 고민을 나눴다기보다는 그 친구가 일방적으로 내게 고민을 털어놓고는 했다. 오히려 우리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는 게 마음 편히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되어, 그 친구는 내게 자주 고민상담을 청했다. 나는 그래서 그 친구가 조금 귀여웠다. 단지 우리가 다른 사람이기에 다를 수밖에 없는 시선의 차이를 그 친구는 언제나 칭찬했고, 나를 치켜세워주곤 했다. 나는 그게 뿌듯했고 기뻤고 그만큼 그 친구를 귀엽게 여겼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뒤, 그 친구는 내게 왔다. 위로의 말을 가지고.
어떻게 너한테 그런 더러운 소문을 붙일 수 있어? 진짜 애들 너무한다. 너한테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말을. 내가 기분이 더 나쁘네. 나 몰랐어, 그런 말들이 있었는지. 수능 끝나고서야 알았네.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 친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알았다. 그 친구의 고민은 6년 내내 언제나 '어떻게 사람들과 섞일 수 있는지'였다. 본인 기준에서의 더러운 소문에 휩쓸린 사람을, 대내외적으로 친한 게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을, 구태여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능이 끝나 모든 소문이 가라앉은 상황에서 뒤늦게야 그 소문을 접할 가능성도 낮았다. 그냥 나랑 친하다는 걸 들키면 지금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멀어질까봐 무서웠던 거겠지. 그러니 외면하고 외면하다 소문이 가라앉은 후에나 다가왔지. 그렇다고 그 친구가 미운 건 아니었다. 그냥 그럴 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친구는 그 해 유행가였던 소녀시대의 'I GOT A BOY'의 한 소절을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너의 왕자님은 언제쯤 너를 구하러 와줄까?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 친구의 천진함에 마음이 쏠렸다. 일부러 외면한 게 아닐 거야. 그냥 상상력이 빈곤해서, 내가 정말 그 소문대로의 사람이라고 상상조차 못 하고 있는 걸 거야. 속이 쓰리긴 했다. 내가 나인 걸 더러운 소문이라고 말하는 건 아무리 애틋한 친구가 말하더라도 상처가 되지 않을 말은 아니니까. 그 친구는 내 귀에 이어폰 한쪽을 꽂아줬다. 재생한 노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울지마' 였다.
울지마
네가 울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작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세상이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은 할 수가 없고
아니라고 하면 왜 거짓말 같지
울지마
네가 울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뭐라도 힘이 될 수 있게 말해주고 싶은데
모두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건 말일 뿐이지 그렇지 않니
그래도 울지마
왜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가슴 아파하는지
그 눈물을 참아내는 건 너의 몫이 아닌데
왜 네가 하지도 않은 일들에 사과해야 하는지
약한 사람은 왜 더
더러운 소문이라는 말에 속이 쓰렸던 나는 조금 꼬여있었고, 그렇다고 그 친구를 미워할 수는 없었어서 그 친구를 더욱 우습게 여기기로 했다. 울지마는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노래가 아니었다. 또 같은 시기 다른 친구가 나를 위로하면서 김윤아의 'Going home'을 들려준 적 있었는데, 그 쪽이 훨씬 더 취향이었기에 비교가 되기도 했다. 고맙긴 한데, 웃기네. 내 감상은 그게 끝이었다. 졸업식날 우리는 사진을 같이 찍지 않았다. 사이가 서먹해져서는 아니었다. 개인과 개인보다는 무리 위주로 형성이 되는 학창 시절의 인간관계 특성상, 같이 사진을 찍을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애틋했다. 졸업 후에도 잊을만하면 연락이 왔고 우리는 근황을 공유하면서도 만나지는 못했다. 연락의 간격은 점점 길어졌고, 이제는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통해서 서로의 안부를 간접적으로 알 뿐인 사이가 됐다.
얼마 전 우연히 브로콜리 너마저의 '울지마'를 다시 들었다. 차를 타고 가던 중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왜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에 가슴 아파 하는지, 억울한 듯 따지며 부르는 가사가 나오고서야 이 노래가 그 때 들었던 그 노래라는 걸 알았다. 오랜만에 그 친구를 떠올리면서 새삼 내가 그 친구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알았다. 시간이 지나 많이 잊어버린 것도 있지만, 우리가 나눈 건 서로의 즐거움들이 아닌 고민 뿐이어서도 한 이유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건 그 친구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생각하자 늦게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렴풋 브로콜리 너마저의 1집을 겨우 구했을 때, 그 친구에게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났다. 그 친구는 전혀 모르는 밴드라고 했고 1집이 왜 구하기 힘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위로 하기 위해 그 노래를 들고 왔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울지마를. 우리는 서로의 기호를 공유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그 노래를 찾아왔다는 건, 그 친구는 작은 단서 하나라도 잡아서 내게 가장 위로가 될 노래를 찾으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 친구를 항상 귀엽게 봤고, 그 친구가 해주는 칭찬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 사려깊음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친구가 내게 뒤늦게야 다가온 건 정말로 '더러운 소문'의 주인공과 가깝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다. 평소답지 않았던 그 호들갑은 미안함을 숨기기 위한 태도였을 수도 있다. 아니, 어쨌든 그 친구는 잘 모르고 한 말이더라도, 나의 정체성을 더럽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때는 그렇게 고맙지않았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이제서야 내게 그런 말 쯤은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적어도 날 위해 위로를 하고 싶었던 것 만큼은 진심이었을테니까. 어쩌면 끝끝내 외면할 수도 있었을텐데, 늦게라도 다가와줬으니까.
온전한 이해와 사랑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온전한 이해와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감사함마저 부정하고 사는 것 보다는, 불완전하나마 그 안에 사랑이 있었다는 걸 발견하는 건 그 슬픔을 상쇄할 만큼 기쁜 일 인 것 같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 나는 그런 불완전한 이해와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어, 더욱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