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이 Jul 27. 2023

예비남편과 맞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름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해 남자친구와의 여름휴가는 없다. 돈 쓸 데는 왜 이렇게 많은지 매주 월급만큼 카드를 벅벅 긁고 있는데, 끝이 없다. 퀘스트 한 개씩 클리어하듯이 지난주는 가전, 이번 주는 침대, 다음 주는 쇼파를 사기로 했는데, 예쁜 건 비싸고 이상한 건 그냥저냥 살만한 가격이다. 그래도 내 월급인 게, 물가가 오른 건지 내 월급이 거지 같은 건지, 이래가지고 어떻게 살(live)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나는 삼포세대라고,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에 살고 있다.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와 맞는 사람,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 이르러 내 인생에 ‘결혼’이라는 중대한 사항을 포기할 때 즈음,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내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난 지 100일 만에 결혼을 하자고 선언했고, 반년 만에 서로의 부모님을 뵈어, 요즘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맞는 두 번째 여름인 셈이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두 딸인 평범한 가정에서, 외박이란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땐, 친구들과 여행도 금지에 엠티도 못 갈 뻔했더랬다. 거짓말 치고 남자친구와 1박2일 여행? 절대 불가능했다. 대부분은 부모님을 속이고 커플 여행을 다니지만, 우리 엄마는 나에 대한 거짓말 탐지가가 내장되어  있는지 0.01초 만에 거짓 유무를 오차 없이 탐지 가능한데다가, 나는 굳이 거짓을 쳐가면서까지 당시 남자친구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번 남자친구와는 처음부터 진중한 관계였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고,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소중했다. 근교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니며 추억을 쌓았지만, 그래도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회사생활로 마음이 지칠 때면 퇴근하고 남자친구와 밤바다를 보러 훌쩍 떠나고 싶기도 했고, 주말밖에 못 보는 장거리 연애로 주말마다 우리 집 근처에 숙소를 잡고 혼자 잠자는 남자친구를 보면 안쓰러워, 함께 있어주고 싶기도 했다.


30살이 넘은 나는 엄마에게 이제 남자친구와 여행 정도는 가도 되지 않겠냐 항의하기에 이르렀고, 그런 엄마는 결혼식장부터 계약하고 결혼을 전제로 만난다는 걸 증명하라고 했다. 우리는 그날로 당장 웨딩홀 세 군데를 갔고 당일 계약을 해버렸다. 여행이 간절했다기보다 결혼에 대한 로망이 없다 보니 더 볼 필요도 못 느끼고 피곤만 했다는 게 크지만 말이다.


기대와는 다르게 결혼을 하겠다는 우리를 보고도 엄마는 여행을 허락하지 못했고, 서로의 감정이 격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당시 아빠는 버킷리스트였던 동남아 한달 살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조금은 남자친구가 마음에 들었던 아빠는 대안으로 남자친구와 같이 치앙마이에 함께 가자고 권했다. 남자친구도 흔쾌히 응해 우리는 첫 여행을 나의 부모님과 함께 해외에서 보내게 되었다.


23년 1월 1일, 치앙마이에서 가장 높은 산, 도이인타논에 다 같이 올랐다. 태국의 겨울은 그렇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등산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구름으로 둘러싸인 산 정상에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식혀가며, 모두가 우리의 결혼을, 우리가 가족이 되는 결의를 다졌다. 치앙마이에서 집 한 채를 빌린 아빠는 나와 남자친구에게 안방 옆 방에 한 침대를 쓰게 해주셨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색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경청하고 내 부모님을 모시는 남자친구를 보며 내 마음도 단단해졌다.  


딸 가진 부모님의 마음은 그럴 것 같다는 남자친구는 나의 부모님께 무사히, 그리고 완전히 인정을 받았다. 이제는 주말마다 2시간을 달려 내려와 우리 집 내 방에서 함께 잘 수 있게 되었다. 침대와 바닥에 각자 누워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손만 마주 잡고 잠을 청하긴 하다만. 데이트는 어쩐지 혼수만 보러 다닌다. 직장생활을 하며 짬짬이 모아두었던 돈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데 무슨 여름휴가냐!


연초에는 치앙망이에서 보냈고, 10월에는 신혼여행을 또 해외에서 보낼 거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인 ‘예비신랑’이라는 신분의 여름휴가는 패스하기로 했다. 내년엔 우리만의 여름휴가가 있겠지-하며, 부부가 된 우리의 첫 여름휴가를 설레는 마음으로 그려본다. 음. 그려만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결국 오늘도 나는 결제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