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큼 다정한 북유럽]- 호밀씨
여행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행기는 한 폭의 영화 같다. 여행작가 호밀씨의 책은 인간극장을 담은 여행기다. 7살 딸아이와 함께하는 부부의 여행은 소소하지만 재미가 있다. 두 달간의 북유럽여행에서 만나는 일상들과 특별한 사건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책 속으로 푹 빠져 든다.
요리하다가 손가락을 칼로 베어 응급실을 가야 했던 상황이나, 여행 마지막 코스 리투아니아에서 우연을 가장해 임산부 친구를 만나고, 2주나 빠르게 쌍둥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보면서 웃음이 난다. 여행도 결국 삶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로 인생의 곡선이 그려진다. 이들 가족이 만난 북유럽의 삶의 양식이나 사회를 지켜보다 보면, 갑자기 그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 진다.
책은 유명한 관광지를 소개하는 뻔한 루트를 벗어나 있어서 좋다. 가정집 홈스테이, 아이들의 놀이터, 마켓에서 구입하는 식자재, 일상에서 소소히 자리 잡고 있는 카페 그리고 주민들의 안식처 도서관들을 보여주는 사진들은 잔잔한 파도처럼 마음깊이 스며든다.
하나의 대가족 같다는 덴마크가 첫 여행지다. 완벽한 휴식을 꿈꾸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휴식을 취하는 날조차 계속할 일을 찾아내고, 걱정거리를 붙들고 있는 일상을 벗어나고자 여행을 한다. 하나라도 더 보고자 바지런히 움직이고, 사진 찍느라 마음의 여유를 위한 여행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여행 후 피곤하다면, 그건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떠나기 전에 스스로 마음 점검이 필요하다. 어떤 여행을 꿈꾸는지 그리고 그 여행지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저자의 말처럼 ‘나를 고스란히 따라 하며 커가는 아이’를 생각해야 한다. 부모가 삶을 대하는 자세나, 여행법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패턴들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아시스텐스 추모공원은 독특하다. 묘지를 공원화 해서 죽음과 삶의 거리를 좁힌 그들의 지혜가 드러난다. 22살의 요나스 법학도의 묘비명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꿈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것은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사람들에게 모독이다.’
아이들 놀이공간에 대한 배려로 도시 전체가 놀이터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가득한 도시는 그 자체가 음악이 된다. 이른 아침 달리는 덴마크의 문화도 이색적이다. 북유럽은 수돗물을 바로 받아 마셔도 될 만큼 깨끗하다는 것 또한 생활의 질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진한 게 아니라 신뢰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덴마크 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코펜하겐의 놀이터 사진이나 호밀빵, 소시지 그리고 야채들은 피곤해질 수 있는 여행의 선물 같다. 북유럽 최대 다문화 국가인 말뫼 또한 인상 깊다.
꿈의 놀이터와 도서관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 영국 아동복지가인 마저리 앨런의 말을 인용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정신이 망가진 것보다 뼈가 망가지는 게 낫다.’ 아이들의 놀이 시간은 어른들이 지켜주어야 할 휴양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갓난아이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놀 수 있는 공간이 부럽다. 도서관이나 학원으로 떠밀려 다니는 아이들에게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해 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기마다 다르게 만나는 그 여정들을 존중해 줄 때, 우선순위가 만들어지고 실천이 될 것이다.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이 아니라 예터보리라는 작은 지방 도시를 먼저 선택한 저자는 가정집에서 조용히 쉬기 위해서 였다. 햇살 따듯한 날은 휴일이라는 솔라르프리(아이슬란드어 Solarfri)를 실천하기 가장 좋은 곳이었으리라. 숲 속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은 공감이 간다. 나도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뉴욕이라 불리는 스톡롤롬은 20% 이상이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14개의 섬을 57개의 다리가 연결하고 다양한 인종들과 화음을 맞혀 살아가는 그들만의 음색은 매력적이다.
부엉이가 품고 있는 미끄럼틀이나 과일들을 온통 거리에 뿌려 논 듯한 놀이 기구들은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오전과 오후의 30분 커피 타임인 피카(Fikka)를 가진 나라 스웨덴. 그들의 행복도가 이 시간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도 공감이 된다. 일을 하다 보면 정신없이 오전이 지나고, 점심식사 후 잠깐의 휴식으로 다시 내달리듯 오후를 보내는 일상은 쉼표를 잃어버리기 쉽다. 함께 조용하게 쉬어보는 피카타임이 삶의 여유를 줄 것이다. 음표들 사이의 쉼표가 삶의 화음을 완성하는 건 아닐까.
자발적 고독을 즐기는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다. 다소 과묵한 국민성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2019년 34세의 나이에 핀란드 최연소 수상이었던 산나마리의 이야기는 그들 사회의 열린 포용력을 느낄 수 있다. 능력 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평등과 협력을 우선시하는 핀란드 문화를 보고, 개인의 재능을 발휘하기 어렵고, 세계적인 일류 대학이나 초기업을 만들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평등과 협력이 높은 사회가 더 행복한 복지국가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핀란드가 보여주고 있다.
핀란드 음식의 특징은 원재료 맛을 살리는데 중심을 두는 것 같다. 각종 양념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국민성을 담은 음식들은 그냥 원재료에 소박하게 접시에 담긴다. 솔직 담백한 음식을 마주하는 일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일 수 있다.
다른 북유럽과 달리 핀란드의 놀이터는 단조롭다. 자세히 봐야 놀이터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여름 방학기간 학교 급식이 없는 시기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위한 무상 급식 이야기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스프, 리조트, 과일 그리고 팬케익 같은 간단한 음식들을 무료로 제공한 역사가 80년이나 된다고 한다.
빼어난 건축미를 뽐내는 헬싱키 안의 오디 도서관과 130년 전통을 가지고 있는 아카데미넨 서점을 통해 책과 만나는 그들의 삶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인들은 그 어떤 암울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근성인 ‘시수’ 정신이 지배 적이다. 우리 문화가 따뜻함을 담은 ‘정’이라면, 핀란드는 은은한 향을 지닌 ‘시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뜻한 향기를 담은 문화를 꿈꿔본다.
산타클로스 마을이나 오로라의 도시 ‘사리셀카’ 이야기는 온통 마음을 뒤흔들게 만든다. 벽면부터 천장까지 전부 유리로 된 창밖 너머 눈옷을 입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저자의 딸 윤서의 뒷모습은 천국의 일부를 보여주는 듯한 착각을 만든다.
여행을 이렇게 간절히 꿈꾸게 만드는 책이 드물다. 삶을 여행으로 만들어야겠다. 세밀하고 섬세한 눈으로 사람을 관찰하고, 근처의 공원이나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주는 책이다. 북유럽, 참으로 매력적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