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들링(paddling)의 중요성
전 세계 서핑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일 것이다. "제가 수영을 못하는데.., 수영 못해도 서핑할 수 있나요?"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항상 같은 답변을 드렸다. “네. 패들만 하면, 할 수 있어요!”
패들링(paddling)은 양 팔로 서프보드 위에서 노를 젓는 동작이자 서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핑은 파도를 타는 운동이다. 그런데 패들링을 못하면 파도가 치는 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어떻게 그곳에 간다고 해도 파도가 칠 때 패들링을 해 파도를 잡지 못하면 파도를 탈 수 없으니 결국 서핑을 할 수가 없다. 같은 계열의 판때기 스포츠를 아무리 잘 탄다고 하여도, 그들이 스케이트 프로, 스노우 보드 프로 선수라 하여도 패들링을 못하면 파도를 잡지 못하니 서핑을 못한다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패들링이 서핑을 입문하는 데 있어 큰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잘하는 방법은 계속 저어 보는 방법뿐이다. 무동력 스포츠 중 하나인 서핑의 세계에서 서퍼가 가진 유일한 동력은 파도와 본인의 팔로 노를 저어 가는 패들뿐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동작처럼 보이는 패들링도 처음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수영과 마찬가지로 계속 저어봐야만 물을 잡는 감도 생기고 자세도 잡힌다. 나도 파도를 많이 잡고 싶어서, 지치지 않는 패들링을 가지고 싶어서 특히 패들링 연습을 많이 했다.
한국은 지역별로 계절에 따라 힘을 받는 파도의 시즌이 다르고, 어느 해변이나 파도의 주름이 한 점도 없는 일명 장판인 날들이 꼭 있다. 서퍼들이 가장 지루해할 이 시간, 파도가 없으니 영화관도 가고 은행도 갈 수 있지만 나는 그래도 바다에 들어갔다. 나는 서핑을 정말 빨리 진심으로 잘하고 싶었다. 파도가 없는 날은 패들링이라도 연습해서 나중에 파도를 못 잡았을 때, 그때 내 패들링이 핑계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부산 송정 해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면 부표가 몇 개가 떠있는 양식장이 보인다. 그래서 장판인 날에는 그 양식장을 목표로 해변부터 양식장까지 패들링으로만 오고 가는 특훈을 했다. 일렁임도 없는 잔잔한 바다였지만, 처음 혼자 먼바다로 나간 날은 상어가 나올까 무서웠고 다음 날은 지나가던 어선이 혹시 나를 치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양팔을 멈추진 않았다. 처음에는 한 시간 이상 걸렸던 여정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니 어느새 반으로 줄었다. 양식장 찍기가 금세 시시해진 나는 다음 목적지를 찾았고 그때 양식장 뒤에 있는 등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 등대까지 한번 가보자.
인류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동경하고 바라볼 때 지구와 달의 거리를 수치화하며 바라보는 사람은 몇 없다. 내가 해변에서 바라본 등대는 양식장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가진 체력도 충분했다. 가보기로 결심하고 양식장을 등지고 등대로 향했다. 지구를 등지고 달 착륙을 꿈꾸는 아폴로 호처럼.
지구와 달의 평균 거리는 38만 4천 킬로미터이다. 출발할 때만 해도 양식장과 등대 사이에 그만큼의 거리가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오른팔이 젓는 소리 다음 왼팔이 젓는 소리, 저은 팔 뒤로 물이 튀는 소리, 그리고 내 숨소리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패들링만 반복하며 영겁 같은 시간을 보냈다. 기세 좋던 체력은 점점 떨어져 갔고 목적지인 등대는 도무지 좀처럼 가까워지질 않았다. 그만하고 돌아갈까 하다가도 이미 온 길이 아까워 어쩔 수 없이 앞으로 저어 나아갔다. 조류는 어찌나 심한지 물에 잠긴 서프보드에는 납이라도 달린 느낌이었다. 중간에 해양 경찰대가 지나갔으면 바로 구조돼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그렇게 어느 서퍼가 해변에서 출발해서 오만가지 생각을 읊조리며 팔로 노를 저어 등대로 가고 있었다.
왜 카메라를 챙기지 않았을까. 등대에 도착하자마자 든 생각이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두 번은 절대 못 오고 안 올 것 같은데 아 이거 찍어야 되는데 여기 갔다 왔다고 하면 믿으려나? 나는 심지어 숏 보드잖아 아니 근데 등대 진짜 크다 아 그만 쉬어야 돼 지금 쉬면서도 떠내려가고 있어. 서프보드에 앉아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환영처럼 보이던 등대를 올려다보며 한 생각이다. 잠시 쉬면서 감탄과 뿌듯함을 느끼며 자축의 시간을 가졌는데 그 시간에 비례해 나는 조류에 의해 계속 떠내려가고 있었다. 인증샷을 남기지 못하는 아쉬움도 잠시, 살기 위해 육지를 향해 다시 패들링을 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고통스러운 어쩌면 그보다 더한 억겁의 시간을 보냈다. 등의 통증, 팔의 아픔을 호소하며 쉬기에는 바다의 조류가 너무도 셌다. 땅을 밟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을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패들링 훈련을 목적으로 시작했다가 훈련을 뛰어넘어 혹사당하는 두 팔에게 미안했다. 그렇지만 계속 저어야 했다. 중간에 쉬고 싶을 땐 양식장을 이용했다. 떠내려가기 싫어서, 패들 한 번도 아까워 양식장 부표 밧줄을 잡고 쉬었다. 배가 잠시 정착했을 때에도 닻을 내리는 이유를 절실히 알았달까. 가는 길은 나름 직선이었다면 돌아오는 길은 조류 때문에 궤도가 완전히 꼬여버렸다. 조류의 변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모른 채 떠내려간 거리만큼 나의 양팔과 등으로 갚아야 했다.
이따금 서핑 강습 시간에 특히 패들링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기 등대 보이시죠? 어디요? 저기요 저기 있는 등대. 아, 네 보여요. 저는 패들링으로 저기까지 갔다 왔어요. 하면 이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하는 수강생들 표정이 참 볼만했다.
그 이후 송정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청사포 다릿돌 전망대가 생겼는데 그 전망대에 서서 처음으로 송정 해변과 등대의 거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해변과 등대의 거리를 마주하고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그날 이후 잠에서 깨자마자 등에서 악마가 울부짖었는지. 왜 밥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밥상에서 숟가락을 그렇게 떨었는지. 왜 두 번 다시는 도전하지 않게 되었는지 말이다.
멀리 떨어진 전망대에서 봤을 때도 해변과 등대 사이의 거리가 시야에 담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연 저 거리에 내 패들링 몇 번이 담겼을까.
이 거리감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대체 패들링 연습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