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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May 26. 2022

길 물어 보는 사람들

왜 러시아인들은 한국인인 나에게 길을 물어 보는 거냐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풍경 중 하나는 길 물어 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관광도시이다 보니 타지 러시아 사람들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 그래서 길을 못 찾고 헤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러시아에 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어떤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와 길을 물어 본 적이 있다.


"성이삭성당, 이쪽으로 가면 되나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여 어어어 하며 말을 못하니까, 그제서야 할머니는 내가 러시아말을 잘 못하는 줄 알고는 손사래를 치며 나를 나무랐다.


"고스빠지, 러시아에 살면서 러시아말도 못해?"


고스빠지는 영어로 치면 'Jesus' 우리말로는 '맙소사' 정도의 말이다. 처음에는 이 말이 무척 기분 나빴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딱 봐도 외국인인데, 왜 나한테 길을 물어보냐고!"


그런데 그 이후로도 그런 일을 몇 번 더 겪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첫 인상에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러시아는 역사의 시작부터 외국인들과 함께 살아 왔으며, 심지어는 오랫동안 몽골-따따르의 지배를 받기도 했고, 이후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과 인접해 살아 왔다. 러시아 내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은 러시아가 오랫동안 여러 민족들과 함께 살아왔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인들 눈에 비친 검은머리 동양인은 외국인이 아니라, 예를 들면 부랴트인이나 고려인일 수 있는 것이다. 러시아어로 말을 걸며 다가오는 러시아인들은 나에게 외국인이라는 차별의 벽을 세우지 않은 셈이다.


오늘 그리보예도바 운하 길을 걸어가다가 또 길 물어보는 중년 여성을 만났다.

그리보예도바 운하


"이 길로 가면 지하철역으로 갈 수 있나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


러시아어도 잘 못하면서 길게 설명할 여유도 없었고, 내가 외국인인데 왜 나한테 묻는 거야 라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래 산 사람으로서 아는 것을 아는 대로 대답해 주면 그것으로 족했다. 나를 외국인으로 대하지 않고, 이곳 주민 또는 같은 러시아 문화 속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생각하오히려 기분 좋은 일이니까. 그래도 '예'라고 짧게 대답하고 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좀 찜찜했다. 20년 살면서 길도 제대로 설명 못한다는 자괴감에 ... 다음에는 이렇게 말하면 러시아 사람 같겠지 하면서 다양한 문구를 머리 속으로 그려 보고는 한 문장을 정리했다.


"Да, идите по набережной, и увидите станцию метро «Сенная площадь»"

"네, 강변을 따라서 가시면 지하철역 센나야 광장을 보시게 될거에요"


이 말이 정확히 맞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러시아어로 길 안내를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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