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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드시선 Feb 08. 2023

마르스 광장

문학에서 혁명으로

죄와 벌 현장을 마친 후의 소감은 한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충족감 또는 죄와 벌 주인공들의 삶에 흠뻑 빠져들었다가 나온 느낌일 것이다. 사실 죄와 벌에는 이 투어에서 담을 수 없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따라서 책한권 읽은 것과 같은 느낌이란 과장된 것이지만, 그만큼 죄와 벌의 감동은 깊은 것이다. 이제 마음을 추스리고 오늘 우리가 완주해야 할 새로운 주제를 향하여 나아간다.


1969년 쿨리자노프 감독의 영화 죄와 벌의 배경으로 사용된 그리보예도바 운하를 따라 사도바야 거리쪽으로 이동한다. 사도바야 거리는 러시아어로 사드 сад 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방어체계 싸드와는 다른 것이므로 오해없기 바란다. 사드는 정원이라는 뜻이다. 넵스키 대로에서 센나야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예전에 많은 정원 딸린 저택들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침 이 길이 여름정원(레트니 사드 ледний сад), 즉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에 처음으로 만든 유럽식 정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우리 말로는 정원길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이 길은 넵스키 대로와 교차하는 도로인데, 도심 내 도보여행 코스로서 추천할만한 길이다. 넵스키 대로 주변에서 볼 수 없는 도시의 또 다른 주요 유적들이 이 길을 따라 산포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니콜라이 성당, 유수포프 정원, 센나야 광장, 아프락신 드보르, 삼미신상, 가스티니 드보르, 넵스키 대로, 미하일 정원, 미하일성, 여름정원, 마르스 광장, 수보로프 광장 등이다.

여름정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


여기서 우리는 드디어 3번 트램을 타고 마르스 광장까지 이동한다. 다만 3번 트램의 배차 간격이 넓은 편이기 때문에 시간에 쫒기는 여행자는 49번 버스를 탑승해도 된다. 트램과 버스 정류장이 거의 같은 곳에 있다. 여유를 좋아하는 여행자는 좀 기다리더라도 3번 트램 탑승을 추천한다. 기본적으로 트램은 이용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차량 내부가 한산하다. 또한 차창 밖 풍경을 유유히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에 바쁜 투어 일정 중의 여유를 즐기는 또 다른 맛을 선사해 준다.

문학과 혁명의 장소를 이어주는 3번 트램


아프락신 드보르는 가스티니 드보르를 모델로 하여 서민층을 위해 만들어진 백화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안나 스니트키나의 회고록에 따르면, 혼수를 장만할 돈이 없었던 그들은 아프락신 드보르에서 가구를 임대하여 설치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곳은 저렴한 도소매 의류, 잡화점이 많이 들어서 있다.


조금 지나가다 보면 사도바야 28-30번지에, 뜻밖의 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건물 1층에 새겨진 3명의 여성 얼굴 조각상은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이 여성들의 정체는 삼미신들이다. 첫번째는 아글라야라는 하는 빛의 여신이고 두번째는 탈리아로 풍성한 행복의 여신이며, 세번째는 에우프로시네로 환희와 축제를 맡은 여신이다. 이 조각장식은 1905년에 생겼다. 러시아 조각가 게오르기 류쩨다르스키가 제작하였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루살카(인어)로 생각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의 손에 닿기 쉬운 곳에 새겨져 있다보니 불량배들이 조각상을 자주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미인상은 신비한 표정을 갖고 있는데, 어찌 보면 자꾸 괴롭힘 당하는 것을 슬퍼하는 모습같기도 하다.

사도바야 거리의 삼미신 조각상


트램을 타고 우리는 넵스키 대로를 지나 미하일성에서 내린다. 미하일성은 예카테리나 여제의 아들 파벨 1세의 명령으로 세워진 새로운 궁전이었다. 파벨 1세는 겨울궁전을 버리고, 이곳에서 러시아를 통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성으로 입주한지 4개월만에 파벨 1세는 그 궁에서 암살당한다. 그 이후 억울하게 죽임당한 파벨 1세의 영혼이 미하일성 주변을 맴돈다는 소문이 생겼다. 불길한 장소가 되다보니, 이곳은 사람들이 사용을 꺼리게 되었고, 결국 러시아 군에게 제공되어 중앙공병학교로 사용된다. 도스토옙스키가 17세였던 1838년에 이 학교를 입학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생활이 시작된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장교였던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법대를 나와 법원에서 근무를 하였다. 그러고보면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가, 음악가들은 다른 전공자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다 글쓰기와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고 흥행에 성공하면서 본업까지 바꾸게 되었다. 천재들이 사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오늘날 본업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영상 제작이나 글쓰기를 하는 크리에이터들의 삶을 도스토옙스키도 살았었다.

미하일 성


미하일성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드디어 마르스 광장에 도착하였다. 이 곳은 18 세기 초까지는 여름정원 서쪽의 넓은 공터였다. 파벨 1세는 여기서 열병식 거행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결국 고대 로마나 파리에 있는 광장과 같이 이 광장을 마르스 광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 곳이 어떻게 혁명을 기념하는 곳이 되었을까? 1917년 2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에서 시가전이 벌어져 400여명이 사망하고 1400여명이 부상당했다. 시민들은 사망자들을 마르스 광장에 묻으려 하였다. 1917년 봄에 기념물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제안되었다. 이에 건축 콩쿠르가 열리고 건축가 루드네프의 디자인이 선정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루나차르스키는 기념물건립위원회를 이끌었으며, 비석의 기념문도 직접 작성했다.

마르스 광장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무명 용사의 묘)


원래 기념물의 명칭은 '러시아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위하여'였다. 2월 혁명의 희생자들만 이곳에 묻으려고 하였으나 1918년 혁명가 볼로다르스키의 묘도 들어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르스 광장의 기념물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그리고 적백 내전에 참여한 혁명 투사들과 전쟁 영웅들을 포함하는 큰 묘지가 되었다. 1919년 11월 7일에 개막된 이 기념물의 바닥에는 12개의 화강암 판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 묘에 묻힌 영웅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념 석축의 4방향 입구의 좌우 측벽에는 루나차르스키가 직접 지은 8개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시간이 흘러, 1957년 11월 6일 마르스 광장 중앙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설치되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은 건축가 마이어피스가 설계하였다. 이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망한 무명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무명 용사의 묘' 라고도 부른다. 소련 당시 레닌그라드였던 이 마르스 광장의 불은 전 소련에 있는 모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965년 마르스 광장에 있는 불을 붙여 벨리키 노브고로드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점화하였다. 그리고, 1967년 5월 8일 모스크바 무명 용사의 묘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배치할 때에도 여기 마르스 광장의 불이 사용되었다. 


마르스 광장에 새겨진 8개의 비문을 읽으면, 혁명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마르스 광장 비문 전문을 소개한다.



마르스광장 비문

비문 작성자 :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

제막일 : 1919년 11월 7일


2월 혁명과 10월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내전에서 희생당한 이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부와 권력과 지식을 소수가 독점하는 것에 대항하여, 부와 권력과 지식이 모두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전쟁을 이끌고 명예롭게 산화하였다.


폭군들의 뜻에 좌우되어 인민들은 서로 고통을 당하였다. 너는 노동의 페테르부르크를 깨워 전쟁의 씨앗을 없애기 위하여, 모든 억압자들에 대항하여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전쟁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러시아 연대기에 위대한 영광의, 슬프지만 밝은 해들로 기록된 1917~1918년은,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잘 익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씨를 심은 것이다.


자유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며 투쟁한 영웅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인류는 무명의 그들을 기린다. 이 돌에 그들에 대한 기억과 명예를 영원히 새겨 넣는다.


위대한 일에 헌신한 이들은 불멸이며, 인민을 위해, 공공의 선을 위해 삶을 던지고, 고생하고, 싸우다 죽은 이들은 인민의 삶 속에 영원하리.


억압, 궁핍 그리고 무지의 밑바닥에서부터, 너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 일어섰다. 모든 인류를 너는 행복하게 만들었고, 노예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무덤 아래 누인 영웅들은 희생자들이 아니다. 당신들의 운명은 모든 은혜입은 후손들의 심장에 슬픔이 아닌, 선망을 낳을 것이다. 피로 점철된 무서운 그 날들을, 당신들은 영광스럽게 살았고 아름답게 죽었다.


다양한 시절 봉기한 영웅들의 전성기라는 이름에 위대한 생명을 바친 주인공들과, 자코뱅당 48명의 혁명투사들과, 파리 코뮌 인민들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들들에게 이어져 있다.


루나차르스키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하였으며, 혁명 후 소련 정부의 교육인민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오늘날 문교부 장관에 해당한다. 그는 파리에서 샤갈과 교류한 적이 있으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혁명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당시 아방가르드 문학가와 화가들은 혁명 정부의 기치가 아방가르드 정신에 부합한다고 보고 협조적이었다. 그 꿈은 곧 깨어지게 되지만, 혁명을 바라보는 인텔리겐챠들은 큰 기대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볼셰비키는 인민들을 압제했던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하고,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공산당 독재를 통해 또 다른 어둠의 길을 가게 되리라고는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첫번째 비문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부와 권력과 지식'이라는 말이다. 보통 유산계급이 '부와 권력'을 가졌다라고만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지식'까지 명시하였다. 21세기에는 더욱 지식이나 정보를 가진 사람이 큰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러시아 혁명 당시에도 그랬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공산혁명은 '지식 민주화'라는 목표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비문을 보자. 당시 혁명가들은 볼셰비키 혁명을 러시아 내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들의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대의를 이은 것으로 본 것이다. 정작 프랑스는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그 반대편인 백군을 지원했는데 말이다. 프랑스 혁명의 기치가 무엇인가? 시민 주권 아닌가?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에서 완결되었다라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비문이라 하겠다. 


여기서 러시아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까지의 혁명사를 짧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인민주의 혁명 활동

1870년~20세기 초, 러시아 최초의 혁명가 그룹인 인민주의자들 혁명 활동 시작한다. 체르니셉스키, 게르쩬, 바쿠닌 같은 러시아 사상가들이 영향을 미친다. 농민을 혁명운동의 주체로 조직해 농촌 공동체를 기초로 공화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 1881년 인민의 의지당 당원들이 알렉산드르 2세를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2. 인민주의 망명자들의 사회민주당 창당과 분열

러시아에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던 인민주의자들은 유럽으로 망명하여 1901년 사회혁명당을 결성한다.  1903년 브뤼셀 및 런던 사회민주당 제 2차 대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회민주당이 확립된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혁명 전략을 둘러싼 심각한 의견 불일치로 레닌 중심의 볼셰비키와 마르토프 중심의 멘셰비키로 분열된다.


#3. 1904년 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일본에 대패한다.


#4.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 

1905년 1월 22일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를 포함한 약 20만명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러일전쟁 패배 및 생계유지에 대한 불만으로 겨울궁전 궁전광장에서 평화시위 개최하였으나, 정부의 발포 명령으로 수백명이 현장에서 사망한다. 1905년 2월 제네바에 망명중이던 트로쯔키 상트페테르부르크 귀환하고, 10월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1905년 10월 17일 니콜라이 2세, 개인의 자유, 두마 선거를 위한 온건한 자유주의적 선거권 부여 그리고 두마에게 완전한 입법상의 거부권 등을 서약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하나, 사태가 수그러 들자, 10월 선언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약속을 무효화한다. 


#5.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6. 1917년 2월 혁명

전쟁에서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패배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처참히 죽어나가자, 1917년 2월 군인들(대부분 농민)의 탈영이 이어지고, 도시 거주자들은 인플레이션과 식량 및 연료 부족을 견딜 수 없게 된다.  1917년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에 페트로그라드 전체에 총파업이 일어났고, 파업 행진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 중 6만명이 반란에 가담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1917년 3월 2일 니꼴라이 2세가 퇴위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도 종말을 맞이한다.


흥미진진한 볼셰비키 혁명의 이야기는 다음 장소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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