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트램 정류장 중 하나인 러시아 정치사박물관은 트로이카 문학과 혁명 투어를 구성하기에 아주 적절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관련 있을 뿐 아니라,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의 볼셰비키당 당사로 쓰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에 자리잡은 이 박물관은 1957년 마틸다 크셰신스카야 저택과 바실리 브란트 저택을 연결하는 중앙 건물을 증축하여 만들어졌다. 중정으로 들어서면 볼셰비키 혁명을 묘사한 붉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러시아 정치사박물관 로비의 스테인드글라스
이 박물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러시아에 존재한 인간과 권력의 문제에 관하여, 둘째는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진행된 러시아 혁명에 관하여 전시하고 있다. 첫번째 전시 주제도 이 글에서 빼고 싶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지만, 트로이카 문학과 혁명 투어는 러시아 혁명과 내전을 다루므로 여기서는 두번째 주제에 대해서만 집중하려고 한다. 박물관 전시물과 그에 관한 혁명사를 언급하는 방식으로 기술하겠다.
1차 세계대전 와중이었던 1917년 2월 17일, 페트로그라드 푸틸로프 공장(현재, 키로프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이 도시 전체로 확산되었다. 전선으로 향하던 니콜라이 2세는 국가 두마를 해산하고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게 노동자들을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처음 수비대는 명령에 따랐으나 2월 27일 새벽 시민에게 발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도시 전체가 시위대의 손에 넘어갔다. 이를 2월 혁명이라 부른다. 참고로, 러시아력으로는 2월 27일이지만, 현재의 달력으로는 3월 8일에 해당하므로, 2월 혁명은 러시아력을 기준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10월 혁명이라고 부르는 볼셰비키 혁명도 러시아력으로는 10월 25일 ~ 26일에 일어났으나 현 달력으로는 11월 7일 ~ 8일에 해당된다.
혁명 직후 수천 명의 군인과 노동자가 국가두마 건물로 쓰이던 타브리다 궁전으로 모여들었다. 입헌민주당 대표 밀류코프가 임시위원회 구성을 제안하자, 2월 27일 국가두마 임시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임시위원회는 미하일 로드쟌코(1859~1924)를 중심으로 모든 당파의 두마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타브리다 궁전에서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군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라는 또 다른 권력기관도 등장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위원장은 멘셰비키에서 오랫동안 지도자로 활동해 온 니콜라이 치헤이제(1864~1926)가 맡았으며, 부위원장 중 한 사람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였다.
박물관에는 니콜라이 2세가 퇴위를 선언한 황제 열차 객실 내 집무실 사진이 걸려 있다. 니콜라이 2세는 황위를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이양하려 하였으나, 그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황위 계승을 거부했다. 그러한 내용이 실린 3월 3일 자 ‘이즈베스티야’지도 전시되어 있다. 이로써 러시아 전제정은 종식되었고, 무정부 상태를 피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즉시 구성되었다. 1917년 3월 2일,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는 게오르기 리보프(1861~1925)를 임시정부 내무부 장관 겸 수반으로 임명하여 초대 연립정부를 이끌게 했다. 이렇게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라는 이중 권력체제로 유지되었다.
정치사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사를 재현한 공간이다. 전시실 벽면에, “내일은 '솔다츠카야 프라브다'지가 나오지 못한다. 우리에겐 자체 인쇄소가 필요하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전시되어 있다. 이 현수막이 보존된 이유는 1917년 7월 사태 직후 임시정부가 볼셰비키의 독일 스파이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물 중 하나로 삼았기 때문이다. 전시실에는 또한 1917년 최초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깃발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깃발도 전시되어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방은 레닌의 집무실이다. 이방의 발코니에서 레닌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과 군인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이곳에서 레닌은 4월 3일에 첫 연설을, 7월 4일에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승인 없이 일부 볼셰비키 군인들이 일으킨 7월 무장봉기 사태는 임시정부로 하여금 눈엣가시 같은 볼셰비키를 탄압할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임시정부 군대는 1917년 7월 6일 크셰신스카야 저택을 점령하여 볼셰비키 당사를 폐쇄하였고, 레닌은 핀란드로 도주했다. 그 동안 무장 봉기를 억제해 왔던 볼셰비키 중앙위원들은 이제 무력만이 권력을 획득할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드디어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레닌이 연설했던 발코니
10월 혁명의 서막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1917년 8월 27일 ~ 30일(9월 8일 ~ 11일)에 일으킨 반란이었다. 전시실에 있는 모니터에서 이 사건의 주요 인물인 임시정부 2대 수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와 러시아군 최고사령관 라브르 코르닐로프(1870~1918) 장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케렌스키는 처음에 코르닐로프와 협력하고자 했지만 코르닐로프가 자신을 내쫓고 독재를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다. 이에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를 반란자로 선언하고,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코르닐로프를 체포하였다. 코르닐로프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케렌스키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볼셰비키의 입지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신했던 레닌은 1917년 10월 초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당 동지들을 설득했다. 레닌이 돌아온 그때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새 의장이 된 트로쯔키가 현장에서 혁명을 진두 지휘했다. 트로쯔키의 제안에 따라, 수도로 진격해 오는 독일군으로부터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한다는 구실로 군사혁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0월 24일 경 케렌스키는 몰래 수도를 떠났고, 10월 25일에서 26일(현 달력, 11월 7일 ~ 8일)로 넘어가는 밤에 볼셰비키 군인들이 겨울궁전에 있던 임시정부를 습격함으로써 10월 혁명은 성공했다.
볼셰비키 군대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전시실
1917년 11월 22일 외무위원 트로쯔키를 대표로 하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독일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그 협정은 곧 파기되었고, 1918년 3월 3일 레닌의 위임으로 게오르기 치체린(1872~1923)이 이끄는 소비에트 대표단이 다시 독일과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서명하였다. 평화조약은 러시아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등 많은 영토에서 영향력을 상실했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레닌에게는 영토를 잃는 한이 있어도 전쟁에서 빠져나옴으로써 볼셰비키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1918년 3월, 적군이 소비에트 정부를 모스크바로 옮기자, 모스크바가 적군의 정치적 중심이 되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 때부터 모스크바는 다시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성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이후로 4년 간의 내전을 치러야만 했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이 러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였다. ‘백군’은 옛 러시아 제국의 변방 지역인 러시아 북서부, 남부, 시베리아, 극동, 중앙아시아에서 형성된 여러 군사 세력과 중도파 및 우파 정치 세력의 연합이었다. 그들은 구심점 없이 각개 활동을 했지만, 소비에트 권력을 거부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백군으로 통칭되었다. 적군의 군사력이 백군보다 현저한 약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백군이 단일 지도부 없이 지리멸렬하였다는 점과 반대로 볼셰비키는 레닌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으며,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였다. 볼셰비키 입장에서 이는 다른 민족들과 전 세계에 볼셰비키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과 적백 내전으로 러시아에서만 800만명 ~ 1,300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산된다.
내전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의 결과로 러시아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 이후 70년간 소련은 러시아와 위성국들의 새로운 국가 모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현재 러시아는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중도 우파가 집권하는 등, 소련의 잔재를 일소한 것 같지만 아직도 러시아 사회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러시아 사회의 모순이 노출될 때마다 소련 시대가 나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부패와 느린 행정 처리를 접할 때는 소련의 완장 찬 관료주의가 아직 남아 있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한국인들에게 소련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한 배후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은 그 역사적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혁명을 남의 일처럼 여길 수 만은 없다. 우리가 러시아 혁명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3번 트램을 타고 레닌의 처절한 외침과 생생한 투쟁 활동을 느낄 수 있는 이 투어의 하일라이트를 향해 이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