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수요일 오후 J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라 고속도로 위인데 길이 엄청 막힌다고 했다. 언니 아들 T의 하원 시간까지 집에 못 올 수도 있을 거 같다고 30분만 봐줄 수 있는지를 내게 물었다.
T는 민준이와 같은 특수학교 졸업 후 현재는 사설기관에 다니고 있었는데 하원 시간이 6시경이었다. 내가 언니네 집으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니 픽업해주시는 선생님께 부탁드려 우리 집으로 가게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6시까지 남은 시간 동안 마침 그날 도착한 택배 물건 중에 남편 회사에서 선물로 받은 간편 소스들이 있어서 몇 개는 언니한테 주려고 종이가방에 담아놓고, 저녁 메뉴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물 좋은 갈치로 난생처음 갈치조림을 하려던 참이었던 지라 저녁도 먹고 가라고 해야겠다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T가 올 시간이 다되어 걸려온 언니의 전화.
"민준 엄마랑 통화하고 나서 다행히 차들이 잘 빠져서 집 근처에 다 왔어. 내가 울 아들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어쨌든 너무 고마워"
"응? 저녁 먹고 가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야. 저녁은 무슨... 담에 만나. 끊을게"
손님이 온다니 긴장했다가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아이들에게도 온다고 했던 T가 안 오기로 했다고 전하고, 언니한테 주려던 물건은 어떻게 해야 되나 갖다 주기도 그러니 이번 거는 그냥 둘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는데 민준이가 말했다.
"이거 T 아줌마 줘야 되지? 그지?"
아까 내가 쇼핑가방에 챙겨놓은 걸 보고 뭐냐고 물어보길래 아줌마 오시면 드릴 거라고 했더니 그새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나 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날 아침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다.
민준이의 반복된 이야기를 들으니 이거는 아무래도 J언니 꺼인가 보다 싶었다. 그래서 다음날 오후 민준이랑 장보고 집에 오는 길에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집에 있어? 어제 내가 언니한테 주려고 담아두었던 게 있었는데 민준이가 자꾸 T 아줌마한테 줘야 된다 그러잖아. 그래서 갖다 줄라고."
"어머~ 민준아, 고마워. 나 집에 있어"
언니네 집에 가서 얼른 물건만 전해주고 나오려는데 언니가 나한테 마음을 전한다.
"어제 울 아들 봐준다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그 덕에 내가 안전 운전을 할 수 있었어."
"은혜를 좀 갚을라 했더니만 언니가 기회를 안 주네"
"은혜는 무슨..."
2019년 남편과 내가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이스라엘 여행(9박 10일)을 떠났을 때 언니는 우리 아들들에게 저녁도 사주고, 급한 일이 생기면 준하가 전화해서 도움 청할 곳으로 흔쾌히 허락을 해주기도 했었다.
"어제 저녁 메뉴가 갈치조림이라 저녁도 먹고 가라고 하려고......"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니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그럼 갈치조림이라고 똑똑하게 말을 했었어야지!!!"
남도 바닷가가 고향인 언니는 해산물, 생선을 정말 좋아한다. 워낙 다른 사람에게 신세 지는 걸 싫어해서 전 날도 급히 전화를 끊길래 더 말도 못 붙였는데 '갈치조림'은 그런 언니도 냉큼 남의 집 대문을 열고 싶게 만들 만큼 강력한 메뉴인 줄 미처 몰랐다.
10년 전, 남편의 회사가 갑자기 판교로 이전을 하게 되어 우리도 낯선 성남이라는 도시에 오게 되었다. 연고가 아무도 없는 이 도시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고, 교육열이 높다는 분당 지역은 괜히 무섭기만 했다. 그러나 남편의 회사와 가까우면서도 전셋값이 저렴했던 곳을 골라서 오게 된 분당구의 가장 끝자락 이 야탑동에서 나는 놀랍게도 시골 인심을 맛보았다.
두려움에 마음 졸이며 이사했던 이 동네에서 10년을 살며 이제는 이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J언니를 비롯한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내가 민준이를 데리고 간다는 전화를 끊고 금방 도착했는데도 그 짧은 시간에 얼른 간식거리를 데워 건네준 언니의 마음이 민준이 손에 든 간식만큼이나 참 따뜻했다.
어디에나 좋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마음,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을 내가 가질 수 있게 해 준 동네, 야탑동이 정말 고맙다. 또한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