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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언정 Nov 10. 2021

노래는 참 잘합니다

노래는 민준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놀이 중 하나가 되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기는 한 거 같다. 민준이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 CD 듣는 걸 좋아했다. 3, 4살 때는 발음도 나쁘고 사용하는 단어도 많지 않을 때라 가사를 정확하게 따라 하지 못하고, "따따따 따따따 따따따따따" 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누가 들어도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하는 동요임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음정이나 박자는 정확했다.


손자가 장애가 있다 하니 양가 집안에서 대놓고 말은 안 해도 걱정이 많았던 민준이 유치원 시절,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잘하는 게 있다고 양쪽 부모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민준이의 노래였다. 또한 지금처럼 흔한 핸드폰 카메라도 없고 동영상 하나 찍으려면 무거운 소니 비디오카메라를 꺼내 와야 했던 그때 그 시절, 메들리로 끝도 없이 부르는 걸 지켜보며 혼자 듣기 참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도 민준이의 노래였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과는 달리, 민준이의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혼자서는 신나게 노래를 참 잘 부르는데 막상 할머니 앞에서 해보라고 세워보면 무슨 일인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중에 발달검사를 받으며 보니 사회성을 점검하는 체크 항목 중에 "할머니나 다른 사람들에서 노래를 부르나요?"라는 항목이 있는 걸 보았다.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아이들은 3, 4살만 되어도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인데 민준이는 9, 10살이 되어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노래는 꾸준히 민준이와 다른 사람들을 이어주는 좋은 매개가 되었다. 교회 목사님이나 구역 식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날의 컨디션이나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 많이 차이가 났지만 마음이 내키는 날은 신나게 찬양을 메들리로 부르고, 신청곡도 요청하면 아빠와 함께 부르던 찬양곡 집을 뒤져 순식간에 그 곡을 찾아내는 신공을 보여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민준이가 초등 3학년 때,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 어려움이 있었다.  쁜 의도로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한 아이가 민준이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서 친구들을 선동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민준이를 통해 알아낸 내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해서 민준이를 잘 교육시켜달라고 당돌한 부탁도 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담임선생님께 민준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부탁드렸고, 어렵게 한 시간을 얻었다.


그날 나는 반 친구들에게 민준이의 특성을 설명하고, 민준이가 잘하는 것들도 영상으로 준비해 가서 보여주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노래였다. 학급 장기자랑 때는 차례가 돌아와도 칠판 앞에 서서 몸을 배배 꼬기만 하다 들어왔다고 했었는데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노래를 시키니 민준이는 거부감 없이 노래를 잘 불렀다. 그 영상을 본 친구들은 "와~ 나보다 훨씬 잘한다!!" 하며 환호성을 내뱉었다. 반 친구들은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도 잘 못하던 민준이가 자신들보다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에 아주 놀라워했고, 다음날부터 아이들의 민준이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졌다.


그러나 민준이의 노래에 위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으니 바로 변성기였다. 목소리 톤이 낮아지면서 민준이는 소리 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는데 특히 고음 부분에서는 진성으로 노래하지 않고 가성을 사용하곤 했다. 노래를 잘 부르다가 고음 파트에서 갑자기 가성의 목소리를 내는 민준이의 그때 그 시절 노래 영상은 지금 봐도 무지 웃기다.  하지만 나는 그때는 마음껏 웃지를 못했다. 그나마 잘하는 노래가 이런 식으로 웃기게 자리 잡고 정착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고비를 지혜롭게 넘겨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남편은 민준이와 노래를 하다 가성이 나오면 민준이에게 "엄마~"를 부르게 시켰다. 하루에 수도 없이 엄마를 불러서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엄마'를 부를 때만큼은 항상 진성의 목소리였다. 가성이 나왔다가도 아빠와 함께 '엄마'를 몇 번 부르고 나면 목소리가 다시 진성으로 바뀌곤 했다. 그렇게 하자 얼마 안가 민준이의 노래는 감사하게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할렐루야~!!




몇 개월 전, 식구들이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빴던 일요일 저녁이었다. 고등학생인 준하는 시험을 앞두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고, 남편은 나의 부탁을 받고 청귤 썰기에 열심이었고, 나는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며 틈틈이 청귤청을 담을 병도 소독하고 설탕도 미리 준비해놓는 등 바빴다. 야심 차게 청귤청을 만들겠다고 청귤 5킬로를 주문해 받았는데 며칠 째 베란다에 방치되어 있던 차라 오늘은 이걸 꼭 마무리해야지 하는 마음이 나에게 가득했던 날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민준이를 챙길 여유가 없었던 그 시간에 무지 심심했던 민준이는 혼자 자기 방에 누워 낮잠 자다 식탁에 앉아 아빠가 청귤 써는 것도 구경했다가, 내가 코드를 뽑아 놓은 TV를 혹시나 하고 리모컨으로 켜보기 했다. 그러다 마침내 성경책을 들고 거실 탁자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는 노래는 정확하게, 모르는 노래는 대충 음을 만들어서 정말 놀이처럼 즐겁게 찬송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부르는데 절로 미소가 지어지게 하는 모습이었다. 찬송가가 끝나자 다음에는 동요곡집을 폈다. 역시 첫 페이지부터 한 곡, 한 곡 끝까지 불렀다.


혼자 놀기도 어렵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도 어려운 것이 자폐성장애 아이들이다.  그런데 민준이에게 노래는 민준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놀이 중 하나가 되었음이 참으로 감사했다. 몸도 마음도 바빴던 휴일 저녁, 1시간 넘게 그렇게 노래 부르며 혼자 노는 민준이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풍성해졌다. 




*아래 동영상은 민준이 10세, 11세, 14세 때 노래 부르던 모습을 연결해서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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