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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랜드 Apr 19. 2022

공황 니가 뭔데

아픈 것과 슬픈 것 사이 그 경계

주방에서 전 굽는 소리가 들린다. 다행이다. 울어도 된다. 울 수 있다. 엉엉 소리 내진 못해도 크게 훌쩍여본다. 한 달에 두 번, 많으면 네 번, 그 이상. 요즘의 일상이다.


가만있어도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에 가슴이 꽉 막혀와 밖으로 나간다. 바람에 시린 눈에선 눈물이 더 마를 새가 없고 이미 눌러쓴 모자가 옥죄도록 꾹꾹 누른 채 숨어본다. 바람을 쐬면 나아질 줄 알았던 나의 믿음은 그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눈물은 뒤로, 정처 없는 발걸음은 앞으로 향한다. 사거리 횡단보도가 날 막아선다. 멈춰 선 걸음에 감정은 더욱 차올라 격해진다. 숨이 가빠온다. 누가 밟고 서있는 듯 왼쪽 가슴의 통증이 휘몰아친다. 빠르게 굴러가는 차바퀴도 경적 소리도 희미해져 간다. 미세먼지로 뿌옇던 하늘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내리쬔다. 그 빛에 날 맡기자니 그 속에 갇혀 영영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다. 집에 두고 나온 아이를 떠올리며 다시 정신을 다잡아 본다. 힘 없이 떨리는 두 손을 포개 폰에 의지해본다. 당장 전화할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한 사람 말고는.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왔다 갔다 선뜻 누를 자신이 없다. 너무 뻔해서. 여보세요 한마디에도 다 알아차리고 말 모습이, 걱정하며 전전긍긍할 모습이.

결국 누른 통화 버튼,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눈물은 더 속수무책으로 흐른다.

자초지종도 잘잘못도 일절 따지지 않고 괜찮은지만 거듭 확인한다. 늘 그랬듯 목소리 들은 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통화가 끝날때쯤이면 그제서야 사색이 되어있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내가 또 나의 아픈 마음을 옮겼구나, 나 편하자고. 나 살자고..' 


때마침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한마디,


“전화해줘서 고마워, 목소리 들으니까 좋다”


숨 끊어지듯 울며 전화했는데, 전화해줘서 좋다니. 그런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니. 평소 같았으면 뭐가 고마운지 왜 좋은지 따져 물어 가며 확인했을 텐데, 그럴 힘도 없이 연신 고맙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별말씀을, 뭐가 자꾸 고마워"


별말도 아니라는 그 한 마디가 가슴속을 파고든다. 이런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잘 알기에 더 소중해진다. 구겨진 내 존재까지도.

누군가에게는 별말 아닌 것도 누군가는 별말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쉬운 말이 누군가는 상상조차 쉽지 않다.


.


3년 전, 이유 모를 증상에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길을 걷다가 극심한 가슴 통증으로 멈춰서 앓는 소리를 삼켰다. 그 일이 몇 차례 반복되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렇게 예약한 곳은 순환기내과. 심전도, 24시간 홀터, 운동부하심전도, 심장 초음파를 순서대로 진행했고 결과는 정상. 다시 증상이 반복되면 내원하라는 마지막 진료와 함께 다시 또 1년, 2년 잊혀져갔다. 당시 다른 가능성은 일체 배제했던 게 문제였을까, 병원을 잘못 선택한 걸까, 그 뒤로 나타난 다른 신호에 눈치 채지 못하고 둔하게 병을 키운 걸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최근 증상들, 돌이켜보니 모든 게 공황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는 병원을 찾지 않았다. 현재의 증상으로는 정말 심장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역류성 식도염, 과호흡 증후군, 그리고 공황일 수 있겠거니 진단만 여러 번 고쳐 써 본다. 설령 공황이 맞다고 직접 듣게된다한들 맘 무거운 건 변함없겠지만, 혹여나 다른 문제가 있을까하는 두려운 맘도 없지않다. 모두 다 똑같은 마음으로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묻어두고 있지 않을까.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고통을 겪고 나면 또 서서히 괜찮아지고, 그렇게 잊혀졌다 하염없이 눈물 흐르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면역을 키워내는 과정이자 성장통의 일부라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세상을 버텨나가기 많이 벅차 온몸에서 사이렌을 울리는 일종의 경고라고 한다면? 그게 맞다면 지체할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모두 내려놓고 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무수한 세월의 공격을 받아내 각기 다른 외상 후 스트레스를 짊어지고 있는 공황의 모습은 아마도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기저질환의 기본값이 아닐까. 스스로만이 자각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처,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상처를 덮어낸 자리에 앉은 흉터들. 늦었지만 모질게도 날카로운 흉터의 가장자리를 보듬어주고 들여봐 주려 한다. 그럼 지금의 나도 먼 과거의 일로 추억되어 웃으며 곱씹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꿈꿔보며 말이다.


.


내 잘못이 아님을 아는 순간부터 '공황'의 이름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도 떳떳해질 수 있는 명분이 생길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절실히 찾아보고 싶어 진다면 그때가 마음의 병에서 해방되는 첫 걸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마음독립만세!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을 미리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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