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클래스 by 고마워 토토
다섯살, 뭐하고 놀까?
오감으로 느끼는 활동이 주를 이뤄야 할 시기이다. 더불어 코로나로 인한 경험의 범위가 상당히 제한적인 시기이기도하다. 자연스레 각 가정에서는 부모가 보육, 교육 모두를 감당해내야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혀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책임지기를 자처하고 있다.
그럼, 뭐하고 놀아줄까?
여기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검색에 후기까지...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왜 그렇게 그것에 몰두하고 있을까.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다. 그럼 '놀아줄 것'을 찾는 동안 아이는? 엄마만 바라보며 함께 놀아주길 오매불망 기다릴테다. 그런 아이에게 "엄마랑 여기 갈래?" 물어보면 대답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엄마랑 집에서 놀래" 집 밖이었어도 상황은 같다. "나는 놀이터에서 놀래" 이미 아이는 엄마한테 단단히 삐져있다.
내가 널 위해 이렇게 열심히 찾았는데 왜 반응도 없어! 라는 생각에 '왜?'라고 물어봤다. 여전히 대답은 변함없다. 아이는 그저 그냥 놀고 싶다. 즐겁게! '무엇'을 향한 엄마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는 그 '무엇'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지금, 당장, 즐거운 놀이가 고프다.
그렇게 아이에게 맞춰주며 아이만 생각하느라 점점 지쳐가는 가정보육의 담임 선생님, 우리는 엄마이다.
체험학습을 가다
올해 1월의 이야기이다. 팬데믹으로 심각했던 작년 12월까진 두 달여를 집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에도 열심히 색다른 놀이를 찾고 있었고, 프라이빗한 이 곳을 알게 되었다. 상황이 나아지길 기대하며 1월로 예약했다.
다행히 1월부터는 다시 등원을 했지만 모든 외부 활동이 차단되어 아이에게는 오랫동안 친구들, 선생님이 전부가 되었다. 물론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은 너무 즐겁고 신이 날테지만, 엄마의 입장에선 갖가지 우려가 쏟아진다.
나의 걱정은, 심심하진 않을까? 였다.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환경 속에 자칫 배움의 흥미를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것은 어른들 의식의 흐름이다. '왜' '무엇'에만 그토록 매달린다. 아이들의 머릿 속은 '오늘 체육놀이 안하나봐, 그럼 우리 여기서 이거하고 놀자.'처럼 간단명료하다. 아이는 심심할 틈 조차도 주지 않고 매 순간 성실하게 잘 놀고 있었던 것이다.
꼼꼼히 찾아보고 예약한 체험학습은 소수의 인원으로 진행한다. 1월 주제는 '제주에서 온 귤'
흙도 파고, 카트에 귤 한 가득 실어 옮겨도 보고, 나무에 물도 주는 귤 농장 체험이다. 직접 따온 귤로 요리까지하는 시간까지 모든것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내용을 미리 설명해주었고, 아이는 기대에 부풀며 신이 났다.
아이가 들어가지 않고 운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모자도 쓰고 장화도 신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점점 아이의 몸은 굳어가고, 눈동자는 많이 흔들렸다. 망부석이 된 채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린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아이의 반응에 나는 혼이 나갔다. 단 1의 의심조차 없던 상황이라 준비된 시나리오가 없었다.
아이가 힘겹게 꺼낸 한마디,
"엄마, 들어가기 어려워...두려워"
눈을 맞춰가며 이어나간 나의 말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답답함에 끝내 아이에게 집에 가길 권했다. 그런데 또 집에는 가기 싫다고 한다.
응? 어쩌라구...
스스로 이겨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고, 방법을 모르니 어렵고 두렵기까지한 것일테다. '어려운' 이 상황이 '어렵지 않은 것'이라는 걸 5세 눈높이로 어떻게 설명해줘야할지 말문이 막혔다. 알았어도 그 상황에서는 조리있고 다정하게 설명해주지 못했을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손 내밀어주신 분은 다름아닌 현장에 계신 선생님이다. 엄마보다 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며 아이를 달래주셨다. 그 표정과 목소리에 오히려 엄마인 내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아이만큼 당황한 나도 누군가가 달래주어야 할 대상이었던거다. 당황한 어른이 어떻게 당황한 아이를 달랠 수 있었겠는가.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였다.
'아이를 위해' 예약한 체험학습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너를 위해' 돈을 지불했고, 수업은 시작했고 시간은 계속 흐른다. 이대로 집에 돌아간다면 돈이 너무 아깝다. 그렇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체험을 예약했고 부지런하고 좋은 엄마인 척 뿌듯했지만, 결국 난 이 시간을 돈으로 샀고, 그 시간동안 좀 쉬려했던 것이다. 돈은 그렇게 아까우면서 두려움에 떨며 보낸 아이의 시간은? 아깝다 못해 안타깝지 않은가.
시작하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미리 설명을 했지만, 시간과 정성이 부족했다. 내 기준에서만 생각했기에 엄마없이 모르는 친구들과 활동한다는 설명이 아이에겐 부족했고, 여기서 '엄마없이' 라는 부분을 직접 겪자 굉장히 당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얼른 수업을 들어야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나는 아이의 감정을 헤아려 줄 여력이 없었다. 문 밖에서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공감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우리는 그렇게 어긋나버렸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아이를 향하는 수 많은 행동과 말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였는지 돌이켜보게된다. 결국 모든게 나를 위한, 나만 생각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도 나고 짜증도 났던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가 말해준다.
"처음엔 너무 어려웠는데, 해보니까 재미있었어! 나중에 또 오자! 또 올래!"
직접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도 시종일관 종알종알,
"내가 만들었는데 어때? 멋지지?"
"내가 만들어서 더 맛있지?"
어떠한지 물어보는 말들이 왠지 나를 다독이는듯 했다. '엄마 나 괜찮아'라며.
진작 나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는 듯 찬찬히 살피며 해주는 말 같아서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도 나도 해냈다. 그럼 되었다.
이렇게 또 우리의 힘으로 한 걸은 나아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