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은 잊히지만 냄새는 사라지지 않아요.” 국제구호활동가 한비야 씨가 지난 4월 18일 혜화동성당에서 열린 ‘가톨릭독서아카데미’ 특강에서 한 말이다. 2004년 일어난 인도양 쓰나미가 인도네시아와 주변 나라 해안을 덮쳤다. 하루아침에 20만 명이 넘는 목숨을 앗아간 21세기 최악 참사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펼쳤다. 희생자가 너무 많아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여기저기 뒹굴었다. 부패한 시신의 냄새가 진동했다. 입고 있던 옷, 쓰고 있는 모자는 물론, 사무실 구석구석에도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참혹했던 모습의 영상(이미지)은 흐릿해졌지만 그 당시 맡았던 냄새의 기억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멸치젓 곰삭은 비릿한 냄새 비슷한 그 냄새를 맡는 날이면 어김없다. 무너져 내린 건물 더미에 깔린 악몽을 꾼다. 구조대원이 손을 잡아주어 겨우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발목을 잡아당긴다. 소리를 지르고 깨어나면 입고 잔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쥐어짜면 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란다. 세월이 흘렀어도 냄새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바람의 딸 '한비야'의 가톨릭독서아카데미 특강, 혜화동 성당
냄새는 그리움으로 남기도 한다. 나의 할머니는 효심이 깊었다고 들었다. 할머니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한 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을 보고는, 옷에 얼굴 비비며 ‘아버지 냄새가 참 좋다. 참 좋다.’ 고해 주변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고 한다. 옷자락에 배인 아버지의 냄새에 아버지가 바로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떠올랐을 게다.
상암동 성당 교우인 마티아 이명기 형제는 아직도 아버지 냄새를 그리워한다. 구수하고 텁텁한 중년 사내의 냄새였다. 아버지는 유달리 자신을 귀여워해서, 열댓 살 되도록 팔 베개 해주고 재워주었단다. 가슴팍에 얼굴 묻고 맡았던 아버지 체취가, 삽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그 냄새가 가슴에 남아서 살아오는 데 힘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냄새가 과거의 기억을 이끌어 내는 효과가 있다는 이론이 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의 이름을 딴,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란 현상이다. 뇌에서 후각 기관이 감정과 기억을 관장하는 기관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냄새를 맡으면, 과거의 삶 속 한 장면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쉽게 떠오른다고 한다. 과자 굽는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 어떤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현상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냄새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유전자를 지닌 이성을 본능적으로 찾는다는 설도 있다. 여성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땀냄새 나는남성이 그여성과 유전적으로 다른 면역 체계를 가진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찾아냈다. 1995년에 스위스의 클라우스 베데킨트(Claus Wedekind) 박사와 그의 연구팀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 결과다. 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극대화하고 더 강한 면역 체계를 가진 자손을 낳기 위한 자연선택의 한 방식으로도 여겨진다.
냄새는 생존을 위한 정보원이기도 하다. 냄새를 맡고 화재나, 위험한 장소를 재빠르게 피할 수 있다. 음식이 부패한 것도 쉽게 구별해 낸다. 냄새를 통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여러 의미를 전해 줄 수 있으니, 냄새를 풍기고 냄새를 맡는다는 것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다.
향기 나는 냄새인 '향'은 종교적으로 의미가 있다. 고대로부터 여러 종교에서 향을 종교의식에 사용했다. 가톨릭에서는 신앙선조들이 하느님께 향기로운 번제물을 바쳤다. 아기예수를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도 유향을 예물로 드렸다. 죄지은 여인은 예수님 머리에 값진 향유를 부었다. 미사 의식에서는 향을 피우기도 한다. 향을 살라 향기를 하늘로 올리듯 정성스러운 마음을 하늘에 바친다.
살아오면서 내가 누린 사치의 하나는 향수다. 예순 전까지, 화장품을 애써, 쓰지 않았다. 로션이나 스킨을 거의 바르지 않았다. 샴푸도 환경을 오염시킬까 봐 쓰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향수는 탐냈다. 외국에 출장이라도 가면, 면세점 향수 코너를 기웃거렸고, 몇 번은 지르기도 했다. 외국인과 만날 때마다 김치 냄새 마늘 냄새난다고 할까 봐 향수를 뿌렸다. 젊은 학생 가르칠 때는, 꼰대 냄새 가리느라고 향수를 쳤다.
향수의 아쉬움은 여백이 없음이다. 부족해야 더 원하듯, 풍족함이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한다. 자연의 꽃 향기는 넉넉하지만, 한 시절만 즐길 수 있으니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꽃잎에 코를 파묻게 하는 장미향. 코를 킁킁거리게 하는 라일락 향기, 파도처럼 밀려드는 아카시아 꽃 향내.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지 않으니 귀하고 소중하다.
불통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소통을 한다 해도 일방적이거나 보여주기식 일쑤다. 소통도 향기처럼 이루어지면 어떨까. 꽃 향기처럼 다가오는 소통,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소통, 지워지지 않는 향내처럼 기억에 남는 소통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소통하다 보면 '향기로운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