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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월 Jun 09. 2024

유희숙 시인의 '시선의 끝'을 읽고

아내가 첫 시집을 냈다고, 친구가 보내주었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부부동반 모임에서 몇 번은 만났지만, 시를 쓰리라 고는 짐작 못했던 분입니다. 그 나이에 시집을 내 다니요. 시집 한 권 내고 싶지만, 주저하며 멈칫거리기만 하다 세월 다 보낸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저 역시, 놀랍고 부럽습니다. 알고 보니 그동안 꾸준하고 착실하게 문학수업을 받았습니다. 2021년에는 <월간문학>으로 등단까지 했네요. 9권의 시집에 작품을 발표했고, 시낭송가로 활동하고 있답니다. 은근슬쩍 자랑할 만도 한데, 친구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경기 사랑의 열매(사회복지공동모금회 경기지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권인욱입니다.



유희숙의 ‘시선의 끝’. ‘시선의 끝’이라는 책 제목에서 시인의 눈길이 어디로 향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책 표지의 짙은 주황색이 주변까지 환하게 합니다. 강렬한 색상을 골랐네요. 첫머리에 실린 시부터 눈길을 끕니다.


우체통과 비둘기


그대 위해 읊조리는 사랑의 노래

겨울은 저물어 가고

여윈 나뭇가지에 물이 오른다.


밤새 베갯잇 물들이며 썼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

곱게 접은 하얀 편지


빨간 우체통 앞 작은 비둘기 한 마리

한동안 망설이다가

우체통 안으로 날아든다


그만 들켜버린 분홍빛 마음

종일토록 가슴만 뛴다.


분홍빛 애틋한 마음이 하얀 편지에 담겨 빨간 우체통으로 들어갑니다. 전하고 싶은 절절한 마음은 작은 비둘기처럼 날아갑니다. 하얀 편지, 빨간 우체통, 잿빛 비둘기, 연분홍 마음까지 색색이 고운 빛깔이 어우러집니다.  


 순수한 마음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지요. 그런 마음이 시를 쓰게 하나 봅니다. 밤을 지새우며 애태우던 마음도, 그 마음을 담아내던 편지도, 우체통 앞에서의 서성거림도, 편지를 부치고서 설레던 들뜸도, 하나, 하나 손에 잡힙니다. 여윈 나뭇가지의 물이 오르듯, 노년에도 사라지지 않는 가슴 뛰던 젊은 날의 분홍빛 사랑을 훔쳐본 느낌입니다. ‘썼다가 지우기를 수십 번’처럼 매만지고 매만져 다듬었습니다.  글자마다 손 때가 묻어 있습니다.


시인 유희숙

 시집을 읽다 보니, 해묵은 사진첩을 펼친 느낌입니다. 빛바랜 사진에서, 먼 시절 희미해진 기억이 살아납니다. 사진 한 장 한 장마다 빨간 동백꽃, 고향마을, 고향집, 어머니가 담겨있습니다.


‘얼음 가슴’, ‘가랑잎 어머니’, ‘늙은 물고기‘, ‘뱃길 닫힌 포구’처럼 시인의 시어는 곱씹으면 상징이 우러납니다. 중의적 의미로 달리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옛날을 노래하지만 현재입니다. 현재를 노래하지만 과거입니다.


시인은 단 한 줄로 한 연을 꾸민 솜씨를 여러 편에서 보여줍니다.

“계절이 끝나가는 산길”

“웅크린 하루가 저물어 간다”

“다시, 빛 고운 동백꽃”

“숨 멎을까 두렵다”.

, 수놓듯 정성 기울인 마음이 곱습니다.


늦깎이 시인이 뒤늦게 펴낸 시집이기에, 해 묵은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시인의 시적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저의 기억과 맞추어 보게도 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서 그런 가요. 읽다 보니 고개가 끄덕거려지고, 때로는 가슴이 짠해집니다.  



시인은 쉬운 말을 골라 씁니다. 동시 같은 느낌이 들 기도 합니다. 하지만 행간에 세상을 넓게 보며, 이웃을 따뜻하고 보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입니다. 시집 맨 끝에 올린 시 ‘함께 가는 길’입니다.


할머니가 유모차를 밀고 간다

유모차가 할머니를 끌고 간다

젊은 날 수 없이 밟았던 길

어둠의 내리막 길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젊은 엄마가 유모차 밀고 간다

엄마와 아기의 마주치는 웃음소리

피어나는 푸른 길로 싱글벙글 달려간다


구부러진 허리 펴고 할머니가 빙그레

달려가던 아기 엄마 씽끗 인사한다


할머니도

아기도 젊은 엄마도

길가에 핀 금계국도 어깨 나란히

노란 웃음 지으며

함께 가는 길


"시인 유희숙 선생님은 떠도는 마음을 끌어안아 사뿐 자박 걷게 하는 참 어여쁜 시심을 가졌습니다. 천하 만물을 사랑과 잉태와 포용으로 가꾸는 시인의 정신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향기 그윽하게 합니다." 소설가 김홍신 선생님이 시집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시 쓰는 마음이란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시를 쓴다는 것은 살아가는 장면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뭐 하나 쉽지 않은 나이에 펴낸 시집입니다. 늦게 피어난 꽃, 오래 피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쁜 나날 돼 소서” 시인이 적어준 인사말처럼, 그 고운 마음씨가 향기 되어 널리 퍼져가면 좋겠습니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곳 너머로.


유희숙 시인의 첫 시집 ‘시선의 끝’은 지난 5월 15일 선우미디어에서 펴냈습니다. 100쪽에 80 수의 시가 담겨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헤아리고 싶은 젊은 분도 추억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싶은 나이 든 분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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