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은 기증하고, 부고는 임종 후 2주 뒤에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사우 김영한의 아들 김진엽의 말이다. 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 기회를 기다렸었다. 문병은커녕 조문도 못 하고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원했다는 소식은 박상규 사우가 전해주었다. MBC 자료부에서 점심시간마다 함께 달리기 하고 같이 밥 먹으며 단짝처럼 붙어 지낸 사이란다. 오랜만에 안부 전화했다가 병색이 짙은 목소리를 들었다. “북부! 북부! 병원! 아파!" 통화가 끊어졌다.
서울북부시립병원에 전화 걸었다. ‘54년생 김영한’이 입원해 있었다. 가족이 아니어서 환자의 상태를 알려 주지 않자, 내게 전화했다. “목소리가 꼭 내 동생이 죽기 전에 내던 소리 같아요. 사우회를 통해 환자 상황을 알 수 있을까요?"
MBC사우회에서 김영한목사와 함께 사목 했던 이원용목사에게 알아봤다. 신장암 말기로, 암이 온몸에 전이되어 북부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박상규의 말이다. “제가 성격을 잘 알아요. 그냥 갔다가 못 만날 수가 있어요. 우선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고, 기회 되면 병문안 같이 가시죠." 병문안 가고 싶다는 그의 문자에 답이 왔다. “회복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문자의 답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합니다. 힘들어서 그러니 연락 없어도 이해해 주십시오."마지막 문자를 내게 보낸 뒤 닷새만인 7월 12일, 김영한 목사는 소천했다. 그는 죽음을 어떻게 마주한 걸까.
이원용 목사를 만났다. MBC TV PD 출신으로 노숙자를 돌보는 마태교회 담임 목사다. 발병에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작년 6월, 김 목사한테 전화가 왔어요. 수요일마다 하던 설교를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고.” 김목사는 허리가 아파 병원에 갔다. 척추 협착 진단이 나왔다. 차도가 없자 큰 병원 가서 MRI 촬영을 했더니 암 증세가 나타났다. 말기 신장암으로, 암이 척추로 전이되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기도 하다가 천국에 가겠다고 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가족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도 했다.
이목사는 고민했다. 가깝게 지낸 김목사 여동생에게 오빠 건강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고만 알렸다. 여동생을 통해서 김 목사 상황이 미국에 사는 가족에게 전해졌다. 한국에 있는 큰아들이 휴가를 내고 아버지의 약국 폐업을 도왔다. 가족의 설득으로 아산병원에 입원하여 척추에 통증을 일으키는 암 덩이를 제거했다.
지난해 김 목사와는 박상규와 같이 두 차례 만났다. 작년 3월에 김 목사의 칠순을 축하하는 소박한 점심을 했고, 그해 11월 26일에는 동갑인 나의 칠순을 기념하는 조촐한 자리를 가졌다. 마지막 만남이 된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하여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김영한 목사의 칠순 기념 모임_왼쪽부터 김영한, 박상규 김승월
올해 초, 건강이 악화하여 북부시립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했다. 호스피스 병동 입원 기한은 두 달. 두 달이 지나 동부 시립병원으로 옮겼다. 다시 두 달 뒤, 북부시립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상규 사우가 문안 전화를 한 것이다. 임종 5일 전에 찾아간 나광화 목사의 말이다. "마지막 시간을 고독과 침묵, 묵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죽음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한 예수님이 떠올랐다. 그도 홀로 피눈물의 기도드리진 않았을까.
그는 아들에게 예수님 잘 믿고 천국에서 꼭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시신은 모교 고려대의 대학병원에 기증하고,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고대 교정에 서 있는 김성수 동상에 오라고 했다. 아들은 반대했지만, 그는 완강했다. 시신 기증 절차를 밟았다. 돌아가자마자 고대 병원에 연락했는데,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의료파업으로 해부학 교실이 진행되지 않아서 시신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병원을 소개해 줄 수는 있다고 했지만, 아들은 없던 일로 했다. 장례식장을 급하게 수소문했다. 나광화목사를 모시고 가족과 가까운 친척만이 모여 조촐한 입관, 발인 예배를 올렸다. 예배를 마치자 곧바로 벽제 화장터로 향했다.
나광화목사 집례 장례예배
김영한은 1980년대부터 신림동 고시촌에서 기도온 성경을 나눠주었다. 토요일에는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 선교 활동을 15년쯤 했다. 함께 봉사했던 이원용 목사의 기억이다.
" 마약중독자였던 수감자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보니, 자기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 말씀하셨답니다. 그 감동으로 성경 공부 열심히 하고 마약을 끊었다는 편지를 보냈어요. 유치장 담당 목사는 그 일이 일어난 날, 그 시간에 설교한 사람을 찾았는데, 김영한 집사였어요. 그 목사는 김 집사에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김영한은 야간으로 북한선교신학원을 마쳤다.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IMF 사태가 터졌다. 주님의 뜻으로 여기고 MBC에서 명퇴했다. 의료 선교의 꿈을 꾸며, 필리핀 라쉬움 대학에서 약사와 치과의사 과정을 밟았다. 한국 약사 면허를 따서 약국을 차렸다. 퇴근 후에는 건대역, 신도림역에서 십자가에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노방선교를 했다.
김영한 목사
토요일마다 성남시 상적동 옛골에 있는 은혜교회에 설교 봉사 나갔다. 성도가 20명 안팎의 작은 교회다. 나광화 담임 목사의 말이다. ” 버스에서 내려 십 리 길을 걸어가야 다다르는 외진 곳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차도 없이 매주 한 번씩 그 먼 길을 17년이나 다녔습니다. “,
노숙인 공동체 마태교회
옛골의 교회와 계약이 끝나자, 영등포역 노숙인 공동체 마태교회로 옮겼다. 이원용 담임목사의 말이다.
'매달 후원금을 내주시고, 명절에는 노숙자들에게 고기도 사주시고, 특히 장애인 노숙자들에게 봉투도 주셨습니다.”
김 목사 아내는 미국의 한 기도원에서 목사로, 마약중독자, 노숙자를 위해 봉사한다. LA에 사는 작은 아들은 의사다. 김 목사는 한국에서 약사 목사 하며 혼자 살았다. 큰아들 김진엽의 말이다.
"아버지는 존경할 수밖에 없는 존재죠. 늘 시계처럼 사셨어요. 약사 시험공부를 할 때, 긴 시간 몰입해서 하시더라고요. 그 도전 모습이 멋졌어요. 아버지는 70대 중반에 약국도 접으려고 했어요, 약사로 해외 의료 선교 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인생관이 죽음관이고, 죽음관이 인생관이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살아가는 방식 아닐까. 스스로 고독과 침묵, 묵상으로 삶을 마친 그다. 침묵으로 전해준 김 목사의 뜻은 무엇일까. 그가 쓴 ‘로마서 말씀 읽기’에 실린 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은 이별하지만, 잠시 후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 영원히 같이 살게 됩니다.”
김영한 지음 로마서말씀읽기
이 글은 MBC 퇴직 사원들의 모임인 MBC 사우회에서 펴내는 MBC사우회보 2024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김영한 목사는 MBC 카메라기자로 시작하여, 방송자료 발굴, 제작, 정리 업무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