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다큐멘터리와 구체음악
효과음향만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뱃소리 들으면 너른 바다가 떠올라 가슴이 시원해지고, 유리병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 끔찍한 사고가 연상되어 온몸이 오그라듭니다. 효과음은 장면을 그려내거나 어떤 사건을 연상시키니, 효과음만으로도 스토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효과맨 경력 40년이 넘는 차부안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효과음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요소입니다. 전면에 나서면 안 돼요.” 이런저런 이유로 안된다는 라디오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향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메시지를 전하는 프로그램은 그동안 국내외의 많은 라디오 연출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시도되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 형태를 ‘음향 다큐멘터리’ Acoustic Documentar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999년, 라디오프랑스에서 새로운 밀레니엄 2000년을 맞아서 전 세계의 라디오방송사와 프리랜서 연출자들을 대상으로 ‘소리사냥 1999’(Concours Chasseurs de Sons' 1999)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음향다큐멘터리 공모대회였지요. 당시 MBC 라디오효과실을 담당하고 있던 제게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어떤 소리로 만들면 좋을까? 세계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한국적인 소리는 무엇일까? 아이디어는 경험에서 나오기 쉽습니다. ‘한국기행, 고향의 소리’, ‘신 한국기행, 산 따라 물 따라’라는 MBC라디오취재 구성 프로그램을 십 년 넘게 만들었었습니다. 이 나라 구석구석 속살을 파고들어, 갖가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취재했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든 뒤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어 버리는 도공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명품 도자기를 만들려는 도공의 집념, 그 끝없는 도전을 도자기 만드는 소리로 구성하기로 했지요. 녹음은 서기봉 사운드 엔지니어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구상하면 알맞은 소리를 착착 만들어 내곤 하는 그입니다. 구성은 방송작가 김광수 선생님이 맡아주었습니다. 라디오다큐멘터리 경험이 많은 분입니다. 고작 4분 30초 길이의 오디오 프로그램을 한 달쯤 현장 녹음하고, 석 달이나 매달려 겨우 만들어 냈습니다. 음향다큐멘터리 ‘끝없는 도전’입니다.
‘뭐, 이래?’ 이 오디오 프로그램을 듣자마자 그런 말 내뱉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합니다. 설명해 주어야 이해가 되고, 몇 번 들어야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1999년, 한 MBC FM프로그램 안에 코너 형식으로 이 프로그램을 방송했습니다. 이 낯선 형식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호기심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중 어느 도공 청취자의 인터넷 사연이 여러 가지를 시사해 줍니다.
“너무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저로서는 그 음악 듣다가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사실 ‘끝없는 시도’는 4분 30초에 담기엔 너무 짧지만.. 가마에서 작품을 꺼낼 때 나는 그 소리의 감격은 쉽게 잊히질 않거든요. 밤새 가마 앞에서 불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도공의 심정을 그대로 읽을 수 있더군요.”
‘끝없는 도전’은 그해 라디오프랑스 소리사냥대회에서 소리창조부문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홍동식 PD의 추천으로 2000년 한국방송프로듀서상 실험정신상도 수상했습니다.
(프로그램 제작기는 다음 회에 따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오디오파일 ‘끝없는 도전’ 길이: 4분 30초
“이 프로그램도 음악이에요. 우리 과 학생들에게 특강 한번 해주실래요?” 라디오 프로그램 ‘끝없는 도전’을 듣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황성호 교수가 그리 말했습니다. 음악에는 지하철 소리, 동물소리와 같은 효과음을 가지고 만드는 ‘구체음악’ concrete music이라는 장르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음향 다큐멘터리도 일종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학생들에게 제작과정을 들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덕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과 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했고, 그 인연으로 KAIST 음악 강의에도 불려 갔습니다. 20년이 훨씬 지난 옛이야기입니다.
구체음악은 생활음향이나 동물소리와 같은 소리로 구성하다 보니, 악보에다 음표 대신 동물이나 사물을 직접 그려 넣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음악은 주류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음향다큐멘터리도 20세기초부터 유럽에서 시도되었지만 인기를 모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정 청취층이 있나 봅니다. 2000년 오스트리아 제1 라디오(OTF1)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음향다큐멘터리 CD를 방송사 기념품샵에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을 얼리는 소리’와 같은 특집 형태로 일부 라디오 프로듀서들이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헬뮤트코페츠키 Helmut Kopetzky 란 독일인 라디오다큐멘터리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라디오 프로그램제작 할 때에 소리의 구성을 악보처럼 만듭니다. 그는 이를 '피처 스코어' Feature Score라고 부릅니다. 피처 Feature란 라디오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우리말로는 '라디오 다큐멘터리 악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헬뮤트 코페츠키에게 직접 부탁해서 피처 악보 몇 편을 받아보았습니다. 소리의 셈여림과 전체 느낌을 그림과 부호, 색으로 표기하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는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음악적으로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라디오프로그램은 음악인 셈이었지요.
훗날 황성호교수의 작곡 발표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악기 연주 사이에 지하철역 현장의 소리(Actuality)가 들렸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구체음악입니다.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노래는 풀벌레 소리로 시작합니다. 구체음악이 아니더라도 대중음악에 효과음이 삽입되기도 합니다. 음향이 음악에 스며들어 음악이 되었습니다. 음향다큐멘터리도 음악이 되듯이 라디오 프로그램도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