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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2. 2024

내가 몰랐던 보라카이

생태 아나키스트의 시선으로 본 보라카이

보라카이에 왜 왔냐고요?


해외 봉사를 위해 보라카이에 왔다. 사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봉사를 하겠다고 여기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야하나. 낭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난 거, 무를 수도 없는 상황. 그냥 큰 마음 먹고 좋은 경험 하고 온다 생각하기로 했다.


하게 될 봉사활동은 보라카이 섬 나바스 지역 원주민들의 생활 환경 개선이었다. 나바스라는 필리핀 시골 마을에서 지내는 원주민들의 삶을 직접 보고,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대도시 관광 휴양을 목적으로한 해외 출국이 아니라, 소위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지역의 원주민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흔치 않았다. 소속되어있는 봉사 단체를 통하지 않았다면 개인적으로 접하기 힘든 일이었다.


제 3세계,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과 생활을 같이 하며 몸으로 실천하는 철학을 했던 이반 일리치나 반다나 시바의 사례를 보면서 나도 그런 생활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또한 두려움과 에고에 맞서고 싶었다.

비건이 된 이후부터는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두려움이 따랐다.


'내가 먹을 게 없으면 어떡하지?'

'가서 굶어야 하면 어떡하지?'

'배고파서 힘들면 어떡하지?' 등등.


종종 그런 두려움이 나의 행동을 가로막을 때도 있었고, 비건과 자연식물식을 철저하게 실천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더 큰 목표를 위한 도전을 망설이게 될 때도 있었다.


생명에 대한 착취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비건을 실천한다면서, 정작 그 비건 실천이 거기에 한 발 더 다가가기 위한 행동을 가로막는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집에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집에만 갇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자연식물식과 변화를 위해 하던대로를 벗어나는 것. 무엇이 더 필요한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안전하고 깨끗한 먹거리를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들로 몸과 마음을 채우는 데에만 집중해도 좋은 일상. 그 평온하고 생기 넘치는 일상이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의 기본권이길 바란다. 아등바등 살아내며 내 의식주와 인생을 돈으로 바꿔먹지 않아도 괜찮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 그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면 두려워도 도전해야 한다.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내고 싶었다. 까짓거 가서 굶더라도 해보자는 용기가 필요했다. 굶는 것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엔 주변에 식당이 아무리 널려있어도 외식비를 쓰고 싶지 않기도 했고 혼자 밥을 사먹고 다닐 만큼 식욕도 없어서 배고파도 잘 참았고, 먹을 것이 없을까 봐 굶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데 비건을 시작한 이후, 두려움이 생기자 오히려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찾아보고 고민해야 했다. 정말로 배고파서가 아니라 배고플 걸 걱정하느라 식사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이런 심리 상태에서도 한 번 벗어나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물론 굶어죽는 일은 없어야 하기에 미리 해상으로 식량을 잔뜩 보내놨다.





보라카이의 불편한 이면 -자본주의와 근대화

보라카이에 도착하니 모두가 한국어를 했다. 자기야, 마사지 좀 받아 봐. 너 머리 땋아 봐. 헤나 해줄게. 가이드 싸게 해줄게.

오죽 한국인들이 여길 싸돌아 댕겼으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보라카이에 도착했을 때 처음 받은 인상은, '이렇게 낙후된 지역으로 굳이 관광이나 휴양을 오는 이유가 뭘까' 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단한 무언가가 없는데도 한국인들이 뺀질나게 와서 본인의 낭만과 쾌락을 흥청망청 소비하러 온다는 방증이었다. 곳곳에서 들리는 한국어가 불편했다. 그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사는 동네지만, 관광지가 되기 전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았다. 그 사람들이 한국어로 호객행위를 하게 만든 건 한국인들이다. 마사지를 받아주고 타투를 받아주는 한국인들의 지갑에 의존하도록 만든 게 한국인이다. 쾌락 쫓기에 여념이 없는 한국인 발길이 여기까지 닿았구나. 이런 깡시골까지 닿았구나. 역겨움이 밀려왔다.




여기 경제 사정은 그 옛날 한국과 비슷하댔다. 기브 미 초콜릿 외치며 미군들 따라다녀 초콜릿 구걸하고, 이제 막 돈을 벌어 근근이 살아가기 시작했던 그 시절 한국말이다.


학교가 들어서며 교육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로 나뉘고, 엘리트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뉜다. 화폐 경제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공짜였던 바나나와 코코넛은 돈 주고 사먹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미국식 상품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콜라와 설탕을 잔뜩 묻힌 빵, 고도로 가공된 과자, 사탕을 먹고 살았다. 주식이 거의 빵이었다. 그것도 건강 식사 빵이 아니라 간식 빵. 그런 음식들은 사람들의 치아와 건강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괌과 다르게 마트에서 파는 것들은 가공식품, 공산품 위주였다. 건강한 음식은 찾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포장 비닐이 버려져있었다. 지구 역시도 상해가는 중이었다.




산골 마을로 들어가면 아주 깨끗한 물이 있었다. 개울 물이 깨끗해서, 그냥 물도 거기서 길어다 쓴댔다. 수도세가 0원이었다. 나무가 우거진 곳은 덥지 않고 시원했다. 지천에 코코넛과 바나나가 널려있었다.


그러면서도 빈곤하여 학교에 가지 못한댔다. 식사가 부실하다고 했다. 쌀과 식용유를 일회용 봉투에 소분해 담아 파는데, 일급으로 하루하루 연명해야 하기 때문이랬다.


절대적 빈곤일까, 근대화가 만들어 낸 상대적 빈곤일까. 생각이 많아졌다.






보라카이의 불편한 이면 -동물권

나바스 숙소의 강아지. 하루 종일 이 짧은 줄에 묶인 채로 생활한다.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인데 사람을 따라갈 수 없어 하루종일 낑낑거리고 컹컹 짖었다. 한참 놀아주고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따라 일어서지만 목줄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설 순 없었다. 짖는 소리가 애처로웠다. 마음이 아팠다.


보라카이에서는 닭을 풀어놓고 키우는 집이 많았다. 그런 집에서는 이런 병아리도 볼 수 있었다. 이 닭들은 왜 키우는 것인지 물어보니, 싸움닭이란다. 발에 칼을 꽂아주고 한 쪽 닭이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우게 한단다. 어느 쪽 닭이 이길지 사람들은 돈을 걸고 도박을 한다. 이긴 닭에 돈을 건 사람들은 상대편 돈과 죽은 닭을 데려온다고 했다.


들으면서 믿기지 않았다. 아직도 이런 걸 한다고. 인간의 유흥과 돈벌이를 위해서 생명을 함부로 굴린다고. 살다살다 투계(?)는 처음 들어봤다. 투우나 투견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이런 곳에서 진행되는 투계 도박은 알려지지 않은 듯 했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했다.




고맙다, 날씨야! 

그나마 다행인 건 날이 더우니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도 아사이볼, 오트밀 등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것 등.


또한 바다를 보고있으면 그래도 조금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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