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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02. 2024

진짜 비건이 된다는 건

착취없는 밥상이야말로 진짜 비건

이번에 보라카이로 단체 봉사활동을 가서 초장부터 비건임을 밝히게 되었다.

이건 먹냐, 저건 먹냐, 너 먹을 게 없어서 어떡하냐, 평소엔 뭐 먹냐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도 않고 단체로 메뉴를 정할 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아서 평소엔 잘 밝히지 않는다.

이번에 비건임을 밝히게 된 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다. 함께 봉사활동을 간 센터장님께서 먼저 "윤슬은 유제품도 먹지 않는 완전 비건이다" 하고 자기 소개 시간에 남의 소개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얼떨결이었지만 이 참에 잘 됐다 싶어 그냥 완전 비건이고, 내가 먹는 것은 어떤 것이고 먹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며 내가 먹을 것은 전부 준비해 왔으니 나를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비건임을 밝힘으로써 내가 주변에 피해를 주는 듯한 분위기가 되는 것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한 번, 두번 비건이라고 밝히고 나서 얻은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꽤나 달랐다. 고기는 왜 안 먹어요? 고기 먹고 싶었던 적 없어요? 등등 호기심 어린 무례한 질문은 항상 받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긍정적으로 반응해주었다. 멋있다, 앞으로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다, 대단하다, 응원한다 등등. 나는 민폐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감사했다.


센터장님은 나의 비거니즘을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칭찬해주셨다.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세상에 저항하기 위해 그 신념을 관철해나간다는 것은 그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고난과 방해물들이 있었겠지만 해냈다는 건 그만큼 본인이 세상의 흐름대로 살지 않겠다는 능동적인 태도로 삶의 주인으로써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 말에 너무나도 감사했다. 말마따나 비건을 처음 시작하면서 느꼈던 감정은 자기 효능감과 자주성이었다. 주체적인 인간으로써 내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 아무것도 모른 채 시스템이 원하는대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


물론 지금은 이 또한 나 혼자서 해낸 일이 아님을 알고, 나의 운명을 정하는 것은 하늘임을 안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은 나의 선택과 운명과 필연이 뒤섞여 일어난다.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가 올바른 길을 향해 갈 수 있도록 나의 앞에 나타나 준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어 보면 신이 나를 인도했다는 기분이 든다. 나에게 다른 운명과 다른 삶을 주셨음에 감사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헤쳐나감으로써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의 자의식 과잉이자 오만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의 도움과 지탱을 받아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보라카이 봉사활동에서 많은 사람들을 돕고, 도움을 받으며 절실히 느꼈다.



내가 먹는 것은 대단하지 않다. 플레이팅에 공을 들이지도 않고, 내용도 대단하지 않고, 조리법도 사진도 대단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과시하고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록을 목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두부 볶음밥과 오븐에 구운 강낭콩.

채식 유부 떡볶이. 간장, 연두, 고추장 듬뿍 넣어 만들었다.

오븐에 구운 떡국떡뻥, 간장 숙주 떡볶이, 연두 야끼소바

두부 넣어 만든 고추장 볶음밥

매콤한 콩나물국밥, 샤브샤브

들깨 수제비

봉사활동가서 함께 만든 된장찌개, 두부 부침, 양파장.

올방개묵과 근대된장국

들깨 샤브샤브


별 볼일 없는 소박한 밥상이지만 화려한 외식보다도 집밥이 좋다. 진짜 비건이 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착취 없는 밥상을 만드는 것이다. 아직까지 텃밭이 없고, 농사를 짓고 있지 않고, 생산자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어서 완벽히 착취 없는 밥상을 꾸리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구매한 채소 중에는 온실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생산된 채소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마트에서 소포장된 것을 구매해 포장 쓰레기를 발생시킬 때도 있었다. 수입산 과일을 먹을 때도 있었고 감자나 고구마 등 구황작물을 손질하면서 버려지는 부분에 가슴아파 할 때도 있었다.


어제는 친구와 외부에서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뉴스를 보았다.

"WHO 통계 결과 전 세계 비만 인구 10억명"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WHO가 추산한 기아 인구는 약 7~8억명이다. 그러나 이 통계 수치는 과소계상되었다. WHO는 일일 섭취량 1800kcal을 기준으로 영양 부족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그런데 일일 섭취량 1800kcal이라는 기준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진국의 카우치포테이토식 생활방식을 기준으로 충분하다 판단되는 열량이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정말로 기아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접시에 음식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한다. 다른 사람의 밥상에 올라갈 환금작물을 짓고, 육체 노동을 하고, 음식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고, 채집하고, 물을 몇 km씩 걸어다니며 길어 온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우 특히 육아, 모유 수유 등을 위해서 더 많은 열량이 필요하다. 계산에 따르면 농사와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은 3500kcal가 필요하다. 그들에게 1800kcal란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실질적으로 필요한 열량을 계산했을 때 기아 인구는 약 14억명으로 증가한다.


아무튼 거의 비슷한 숫자의 인구가 한 쪽은 비만으로 고생하고 한 쪽은 영양실조로 고생한다. 말도 안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식량분배가 정의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같은 종족이 굶어 죽을 때 한 쪽에서는 배불러 죽는 동물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러고 있다.


인간은 타자의 착취를 먹고 사는 문명을 세운 유일한 족속이다. 역사 이래 문명은 언제나 착취할 기반을 요구해왔으며, 특히나 현대 문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온통 식민지로 만들어 노동력과 자원과 생명력을 뽑아먹기 바쁘다. 생산을 위해 모든 것을 고갈시킨다. 지구, 동물, 동족,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사람들이 비만해지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빈자 혹은 약자의 고통을 먹었기 때문이다. 


약자의 고통은 먹는 사람 몸에 켜켜이 쌓여 빠져나가지 않고 부풀어오른다. 식을 줄 모르는 먹부림 열풍은 치유의 반대편에 서있다. 마라탕, 탕후루, 스시, 한우 오마카세는 세상을 병들게 만들어야 존속되는 산업이다. 선진국을 배부르게 하는 식품 산업은 그들의 건강과 심신을 빈약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든다. 마치 그 생산 과정에서 땅을 황폐화시키고 빈곤을 자아냈던 것처럼. 화학비료의 과도한 단백질이 땅을 경색시킨 것처럼, 우리의 몸도 경색시킨다.


억지로 살찌운 가축을 먹으며 웰빙이니 보신이니 하지만 결국 몸은 탁해진다. 자연은 우리가 한 일을 알고 있다. 자연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괴로웠다. 내가 먹고 있는 상품이 누군가를 굶겨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누구는 자본주의가 차려놓은 풍요로 건강을 잃을 만큼 부풀어오르는 반면, 누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빈곤으로 배고픔에 시달린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배부르게 하는 것이 부디 누군가를 배고프게 만들면서 생산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남을 굶기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 식탁을 꾸리면서 남의 식탁을 약탈하고 싶지 않다. 생산지가 멀어지고 생산자의 이름과 얼굴이 희미해질 수록 착취의 구조는 불투명하게 가려진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먼 타지의 사람들이 거대한 자본 권력 아래 배 곯아가며 피눈물 흘려 생산해낸 것들을 우리는 감히 가성비라 부른다. 동족을 죽이는 기업에 기꺼이 돈을 바치는 가축으로 살아간다. 내가 먹을 것을 마트에 진열해놓기 위해 그 사람들은 자급 농사를 포기한다. 생계 수단을 포기한다. 자립을 포기한다. 존엄하게 먹고 살 권리를 잃어버린다.

타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차린 식탁은 나에게도 독이 된다. 우리가 타자에게 행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최대한 내 살림이 남의 죽임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쓰는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삶과 터전을 파괴하지 않은 것이기를 바란다. 최대한 모든 것이 내 눈 앞에 투명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기를 바란다. 착취의 레로부터, 불평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올해는 조금 더 많은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보기로 했다.

자립을 위한 농사를 배울 것.

생산자와 생산지를 알 수 있는 농산물 직거래를 더 이용할 것.

생협의 물건을 더 이용할 것.

수입산 음식을 먹지 않을 것.

언니네 텃밭 등 공동체 지원 농업을 이용할 것.


냉장고 없이 독일에서 생태 부엌을 차리고 계신 김미수 님의 글을 읽으면서 모든 유기농이나 국내산이라고 해서 더 생태적인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자본주의 아래 이루어진 거대한 식량 시스템에서는 그 생산 과정을 세세히 볼 수 없으니 어떤 게 최선의 선택인지 따져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의 자립이 타자의 자립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룹 우핑이나 해외 장기 우핑, 국내 우핑, 자연농 학교 청강 등을 통해 실천해 볼 예정이다. 나의 의식주가 타인의 피눈물이 되지 않도록 더 자급할 것이다. 자연이 나에게 허락한 것만을 취할 것이다.


진정한 평화를 위한 진정한 비건은 의식주의 자립자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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