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가벼운 설전이 벌어졌다. 평소 유튜브를 즐겨보던 지인이 한 정치인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물었고, 나의 대답이 기대와 다르자 벌어진 설전이었다. 필자는 평소에 이런 식의 정치 토론은 피하는 편이다. 정치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도무지 결론도 이득도 없으니 하지 말자는 거다. 토론이 끝나면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고 서로의 생각도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멀쩡하게 잘 지내던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세상, 이른바 이념의 양극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필자가 기억하는 양극화의 시작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분배, 환경, 대북정책 등의 분야별로 진보와 보수의 이념 논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시국에 이르러서는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이른바 촛불과 태극기로 짝 갈린 것이다. 문제는 한 번 나뉜 진영이 시간이 지나면서 틈을 좁히기보다는,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무리를 이루어 소통하고 증폭하면서 그 벽이 단단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원인을 '대통령 탄핵'이라는 한국 정치사의 한 개 사건으로 특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나라와 정치 상황이 다른 나라들,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여부를 둘러싸고 비슷한 상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디지털 뉴스'의 등장에 따른 사회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추천 알고리즘의 등장, 그리고 유튜브와 SNS의 폭발적 성장 등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른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 20년 전망해도 사람들은 주요 신문사나 방송사의 뉴스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했다. 물론 매체별로 관점이 달랐지만,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스템에 의해 걸러진 것들이었다. 대체로 균형된 시각에서 양쪽 입장을 고루 전달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KBS나 MBC 뉴스를 함께 시청했고, 지하철에서는 몇 개 일간지 중의 하나를 펼쳐놓고 읽었다. 이런 매체 환경에서는 세대별로, 혹은 진영별로 나뉘는 극단적 양극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생기고 유튜브라는 매체가 등장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원하는 채널, 입에 맞는 뉴스만 소비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부채질한 것이 바로 추천 알고리즘이다. 내가 무슨 물건을 구매했는지, 어떤 사이트에 접속했는지를 AI가 분석해서 취향에 맞는 상품을 자동으로 띄워주는 추천 알고리즘. 그런데 상품이 아니라 뉴스까지 추천하게 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람들은 내가 보는 뉴스가 알고리즘에 의한 추천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어렵다. 오히려 세상을 보는 유일한 관점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게다가 일인 미디어 세상이 열렸다. 법적 규제나 사회적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전문성과 균형감이 다소 떨어지는 뉴스들도 얼마든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뉴스를 한 번 소비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비슷한 뉴스들이 따라오고, 그런 뉴스를 소비하는 사람들끼리 커뮤니티가 형성되니 온 세상 사람들이 내 생각과 같아 보이고, 이런 과정들이 순환하면서 더욱 자기 생각에 확신을 더하게 된다. 디지털 혁명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소통의 장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이념의 양극화라는 전에 없던 세상의 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해결책은 없을까? 미디어 학자도 정치가도 아닌 필자가 제시하는 소박한 해법은 이것이다. 우선 유튜브나 포털뉴스 뿐 아니라 주요 언론사에서 생산한 뉴스, 혹은 나와 다른 시각의 뉴스도 함께 접하는 것이 좋겠다. 나아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나쁜 뉴스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고민하고 제시하는 착한 뉴스를 고르는 것도 필요하다. 혹은 양극화에서 자유로운 이슈, 예를 들면 지역의 정보와 현안들을 많이 읽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성숙한 민주주의는 슬기로운 뉴스 소비에서부터 시작된다.
(2023년 10월 18일자 주간 '보은 사람들'에 실린 본인의 글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