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반 위에 적당한 부피로 꺼내놓는다. 스무 장쯤, 굽기에 지루하지 않으면서 서너 번 만에 먹기에 딱 좋은 양이다. 옆에는 들기름과 솔, 고운 소금, 그리고 석쇠와 가스레인지가 대기하고 있다. 김을 굽기 위한 세팅이 끝났다.
김을 재우기 위해서는 우선 표면을 살펴야 한다. 김에는 거친 면과 매끈한 면이 있으니, 거친 면을 위로 향하게 놓는다. 매끈한 면보다 소금이 잘 붙기 때문이다. 작은 솔로 들기름을 슬쩍 바르고 고운 소금을 엄지와 검지로 딱 한 꼬집만 집어 골고루 뿌린다. 이렇게 스무 장을 모두 재우고 나면 이제 가스레인지가 등장할 차례다. 불은 중불 보다 약간 낮은 정도가 적당하다. 석쇠에는 김 두 장을 겹쳐 놓는데 이왕이면 기름 발린 부분이 안쪽에서 맞닿게 하는 게 좋다. 불에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이제부터가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다. 불 위로 10cm쯤 높이에서 스르르륵 지나가며 굽는다. 석쇠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도,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려도 안 된다. 너무 빠르거나 높으면 김이 제대로 익지 않아서 고소한 맛이 덜하고, 너무 늦거나 낮으면 불이 붙어 타버린다. 김의 상태를 살피며 약간 연기가 날 정도로, 그야말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딱 필요한 만큼만 불 기운을 쐬어야한다. 이제 거의 끝났다. 네 귀를 맞추어 잘 포갠 김을 가위로 자르는데, 내 경우에는 여섯 조각으로 나눈다.
김을 굽자고 제안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그동안 가끔 마트에서 구워서 자른 조미김을 사 먹었었다. 그러나 마트에서 산 김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크기가 너무 작았다. 손가락 세 개 정도의 크기는 밥 한 숟가락에 턱없이 부족했다. 약간 덜 익은 듯 식감도 파삭하지 못했고, 상큼한 짠맛도 부족했다. 가끔 오래된 기름 냄새나 조미료 맛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터무니없이 작은 양에 비해 과한 포장지가 마음에 걸렸다. 겨우 김 몇 장 먹자고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게 영 찜찜했다. 생각해 보니 시간 많은 은퇴 백수가 손수 굽지 못할 이유가 없다. 펼치고 바르고 굽는 과정이 다소 번거롭기는 하지만, 남아도는 시간을 재미있게 소비할 이벤트가 아닌가? 아내와 마트에 간 김에 생 김 한 묶음을 사서 판을 벌인 것이다.
구운 김 한 장을 입에 넣어본다. 먼저 파삭한 식감이 즐겁다. 뒤이어 들기름과 김이 만들어 내는 오묘한 고소함, 그리고 천일염의 상큼한 짭조름 함이 동시에 혀를 감싼다. 입안에 침이 스르르 고이며 적당한 허기가 슬그머니 올라온다. 그래, 바로 이 맛이다. 자고로 김은 이래야 한다. 눈을 감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점심을 거르는 이들이 제법 있던 60년대, 모두 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충주시 변두리에서 조그만 과수원에 여덟 식구가 오글오글 모여 살았으니 겨울 반찬이라는 게 뻔했다. 김치광에서 막 꺼내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한 김장김치를 숭덩숭덩 썰어놓고, 김치에 박아 넣었던 넓적한 무 조각을 통째로 올려놓는다. 지고추나 깻잎장아찌가 구색이나 맞추려는 듯 밥상 귀퉁이에 놓여 있었으나 손길이 자주 가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돼지비계를 넣은 김치찌개나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짠 간고등어가 올라오기도 했지만, 이건 좀 까다로운 '비린 반찬'이었다. '비린 반찬'은 암묵적으로 남자 어른들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아예 젓가락질하지 않았고 아이들에게는 그나마 두세 번 정도 허락되었다. 그 이상 젓가락이 드나들었다가는 먼저 엄마의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지고, 그래도 계속해서 들이밀다가는 할아버지가 소리 내어 숟가락을 내려놓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고기나 생선은 아니지만 김도 어엿한 '비린 반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느 핸가, 갑자기 김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겨울이 있었다. 빠듯한 시골 살림에 갑자기 돈이 생겼을 리는 없고 보면, 아마 그해 김이 엄청나게 풍년이었나 보다. 여하튼 어린아이와 여자들 할 것 없이 김을 마음껏 먹었다. 그런데 60년 전에 김을 굽고 먹는 모습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우선 기름 바르는 솔이 달랐다. 플라스틱 솔이 없던 시절, 김 솔은 솔가지가 대신했다. 파릇한 솔잎이 열댓 개쯤 달린 작은 가지를 기름 종지 위에 눕혀두었다가 살살 문지르면 기름이 골고루 묻는다. 나는 아직도 솔가지로 기름을 바르는 낭창낭창하고 보드라운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싼값에 두고두고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솔이 흔하지만, 부드럽고 골고루 묻히기에 솔가지를 당하지는 못한다고 확신한다. 소금은 굵은소금을 도마 위에서 칼자루로 콩콩 빻아서 뿌린다. 지금처럼 조미료가 들어 있거나 구운 소금은 없었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빻았다고는 하지만 공장제품처럼 일정하게 고울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간혹 김에는 굵은소금 덩어리가 한 개씩 붙어 있다가 으적 씹히기도 했다.
플라스틱 쟁반이 없고 보니 김을 재우는 침대는 주로 나무 도마였다. 여기에 수십 장을 재워서 밥을 짓고 난 숯불에 석쇠로 굽는다. 발간 숯불에 적당한 거리를 떼어 석쇠를 움직이면 김은 푸르스름한 연기와 함께 검은색에서 윤기 있는 초록빛으로 물감이 번지듯 변하고, 고소한 냄새가 부엌에 가득 퍼진다. 가끔 소금 알갱이가 숯불에 떨어져서 파사삭 불꽃을 일으키기도 하고, 쪼그려 앉아 발이 저린 누나는 주춤주춤 발을 옮기며 벌게진 얼굴로 김을 구웠다. 이렇게 구워서 수북이 쌓아놓고 손으로 꾹 누르면서 칼로 잘랐다. 지금 같으면 가위로 싹둑싹둑 쉽게 자르련만, 이상하게 그 시절에는 가위를 쓰지 않았다. 이제 자른 김을 오목한 접시에 담고 꼬챙이로 찔러서 고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부엌에서 안방으로 상을 들고 가는 중에 김 다발이 쓰러지거나 날아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김 꼬챙이는 주로 가느다란 사과나무 어린 가지나 성냥개비가 쓰였는데 내 눈에는 성냥개비가 더 멋있었다. 빠알간 머리가 검은 김 위에 목만 내놓고 있어서 마치 호수에 핀 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건강에 좋을 리 없건만,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갓 구운 김은 뭐니 뭐니 해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과 찰떡궁합이다. 그런데 김을 먹는 방법도 다양했다. 밥을 한 숟가락 뜨고 그 위에 척 얹어서 먹는 것이 보통이지만, 밥숟가락을 김 접시에 꾹 찍어서 숟가락 밑에 붙여서 먹는 이도 있었고 어린아이들은 왼손에 김을 펼쳐 들고 밥을 한 숟가락 얹어 돌돌 말아먹기도 했다. 밥 한 숟가락 먹고 나서 김 한 장을 입에 넣는 경우는 없었다. 둘은 함께일 때 맛과 식감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연거푸 서너 번씩 기름진 김만 먹으면 개운한 입가심이 필요했다. 이럴 때 딱인 게 바로 김치 속에 묻어 두었던 무 조각, 김치무였으니 사실 김치무와 김 한 접시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겨울 진미였다. 할아버지와 큰 형님은 사랑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인 나를 포함해서 조롱조롱 4남매는 안방에서 꽉 차게 앉아서 김 반찬으로 밥을 먹으면 우리 집이 부잣집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행복했다는 말이다.
추억에 잠겨 김을 먹는데, 속내를 알 리 없는 아들 녀석이 한마디 던진다.
"웬 김? 마트에서 사지 않고"
"야, 이게 진정한 김이지. 그리고 아빠가 김 굽는 데 선수야, 김 선수"
기껏 어렸을 때 몇 번 재워본 기억으로 뻥 치는 나에게 아들 녀석의 아재 개그가 훅하니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