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 은퇴를 꿈꾸고 퇴직날짜를 손꼽아 세던 패기는 다 어디로 가고, 최저임금 받으며 꼬박꼬박 근무일지에 사인해야 하는 직장에 다시 나가다니. 게다가 돈을 벌러 마지못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설레는 가슴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하다니. 퇴직하던 3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 내게 벌어졌다.
그 시작은 퇴직하고 3개월쯤 지나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시작되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만 모른 채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딱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말이다. 처음 시작은 아주 단순했다. 그저 슬슬 심심해졌을 뿐이다. 해방감은 석 달이 가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다 보니 그 자체로서 행복해지는 것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에 나의 행복감에 찬 물을 끼얹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아내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아내는 회인 읍내의 행정복지센터에서 기간제 근무자로 1년 전부터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채용으로 마침 내가 퇴직할 무렵 잠정적 실업상태였다가 다시 출근을 시작했던 것이다. 어쨌든 늘 나와 붙어 있던 짝꿍이 출근을 해버렸다. 낮 시간 동안 나는 혼자서 놀아야 한다. 뭔가 이벤트가 필요했다. 집도 고치고 텃밭도 가꾸고 주부로서 집안 일도 시작했다. 그러나 집 고치기는 두 달 만에 끝나 버렸고 혼자 풀 뽑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으며 하루 두 시간의 집안 일로는 긴 긴 하루를 채워낼 수 없었다. 심심했다. 이번에는 내일 배움 카드로 목공을 배우러 다녔다. 직장인의 퇴근 시간에 맞춘 강의를 들으러, 저녁 7시에 시작해서 밤 아홉 시까지 주 5일을 대전으로 다녔다. 그러나 이것도 석달 만에 끝나버렸다. 주말이면 아내와 짧은 여행을 하거나 둘레길을 걸었지만 평소의 공백을 채우기에는 아쉬웠다. 또다시 심심했다. 아내는 간단히 '은퇴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내렸다. 그 간단명료한 일반화가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즈음 새로운 이벤트가 생겼다. 속리산 둘레길 사무국에서 둘레길에 대한 사진과 글을 부탁한 것이다. 괴산 구간이 새로 관리구역으로 편입됐으니 이곳 구간에 대한 글과 사진을 써 달라는 거였다. 조건은 단순했다. 원고료는 없이 픽업차량과 점심값에 안내해 줄 등산지도사를 붙여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게는 황송한 조건이었다. 원고료야 어차피 프로 글쟁이가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고, 내 돈 내며 해도 좋을 일에 차와 밥, 그리고 가이드까지 마련해 준다니 이 얼마나 황송한 제안인가? 냉큼 수락하고 두 달에 걸쳐서 코스를 걷고 글을 썼다.
그 과정에서 멋진 둘레길과 함께 등산지도사라는 직업을 만나게 되었다. 숲길 등산지도사, 처음 듣는 낯선 용어다. 숲길 등산이야 그냥 삼삼오오 하면 되지, 이걸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낯설었고 이게 필요한지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격증 제도가 시행된 지 불과 5년여를 넘지 않아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괴산길을 안내해 준 숲길등산지도사의 권유로 교육을 받게 되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아예 둘레길을 관리하는 직장에서 근무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일단 출근길이 즐겁다. 직장에서 해야 하는 일이 길을 따라 걷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리부터 계획하고, 집에 와서도 고민을 떨쳐버릴 수 없는 머리 아픈 취재나 편집이 아니다. 머리가 아닌 다리를 쓰는 일,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라 맑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제법 쌀쌀한 이른 봄, 차가운 공기를 뺨으로 느끼며 길을 걷고 점검하는 일은 언제라도 즐겁고 가슴이 설렌다. 사실 요즘 계절이 걷기에는 제격이다. 모자와 장갑, 도톰한 재킷 등 약간의 복장만 갖추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걷는 일에 집중하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걸으니 그것도 좋다. 부지런히 걷고 사진 찍다가 가끔씩 살아온 얘기, 살아가는 얘기들을 나누기도 한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니 아주 짧은 몇 마디에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화들이 즐겁다. 함께 싸 온 도시락을 나눠먹거나 우연히 맛난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일도 은근 기대되는 이벤트이다. 그렇게 걷다 보면 하루에 2만보를 넘기기 쉽다. 하루에 겨우 몇 천보를 걷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부자가 된 느낌이다.
내가 이 일을 얼마동안이나 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얼마 동안이나 행복한 마음으로 출근을 할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비슷한 일과의 반복에 흥미를 잃거나, 그러기 전에 기간제 근무가 끝나서 일할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의 불행에 미리부터 현재를 구속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 대로 그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삶의 지혜 정도는 터득할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단체 둘레꾼들을 안내하는 날, 나는 다음과 같이 나를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속리산 둘레길을 소개하고 함께 걸을 숲길등산지도사 심웅섭입니다. 숲길등산지도사라는 말이 너무 길고 생소하시죠? 그렇다면 '숲길등산지'라는 다섯 글자를 빼 버리고 '도사'라고 불러주세요. 오늘 재미있고 안전하게 트레킹 할 수 있도록 이 심 도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30여 년간, 나는 방송국 PD로 근무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을 했으니, 학생이 아닌 어른으로서의 삶은 오로지 방송국 PD로 살아왔다. 여북하면 '심 PD'라는 호칭이 이름보다 더 이름처럼 느껴질까? 그런데 이제 나는 PD가 아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심 PD로 부르긴 하지만 나도, 나를 부르는 사람도 내가 PD가 아니라 은퇴백수임을 잘 안다. 다만 마땅히 부를 호칭도 없거니와 그렇게 불러주어야 왠지 좋아할 것 같아서 그리 부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은퇴 후에도 직장 생활할 때의 직위와 직업으로 불리는 것은 왠지 처량하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 같아서다. 현재의 '나'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나를 묶어 두는 것도 쓸쓸하기 짝이 없다. 묶어 지지도 않을 뿐더러 묶으려고 할 수록 별 볼일 없이 처량한 은퇴자, 잉여인간이 될 게 뻔하다. 차라리 '화려한(하다고 착각하는)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현재'를 붙드는 것이 훨씬 더 폼나고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까? 이제 나는 퇴직한 '과거의 PD'가 아니라 새로 시작한 '현재의 숲길등산지도사', 약칭 '도사'이다. 물론 마음대로 구름을 타거나 도술을 부리지는 못하는 햇병아리 도사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