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때 아닌 저녁 산책에 푹 빠졌다. 워낙 뜨거운 여름이라서 한낮 더위를 피할 겸 운동 삼아 시작했는데, 요게 뜻밖의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시골에 살지 않으면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그것도 시간이 많은 백수 라야 즐길 수 있는 저녁 산책의 맛을 조금 공개해본다.
오후 다섯 시, 더위가 한풀 꺾인 이 시간이 우리 부부의 저녁 산책 시간이다. 집에서 대청호를 따라 차로 5분여만 달리면 남대문에 도착하고 여기서 주차하고 왕복 한 시간 반쯤 걷는다. 참고로 남대문은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충북의 보은군 회남면에도 비록 대문은 없지만 남대문이라는 지명이 번듯하게 남아있다. 처음 코스는 산소와 과수원 사이로 난 평범한 농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걷는다. 너무나 평범해서 자칫 지루하기 쉬운 구간이니 경치 구경보다는 열심히 걷는데 집중하는게 좋다. 아직 한낮의 열기가 제법 남아 있는 시간, 어느새 호흡은 가빠지고 등줄기가 땀에 흠뻑 젖는다. 물론 좋은 일이다. 덕분에 내 몸에 쌓인 노폐물은 빠질 테고 내 다리 근육은 탱탱해질 테니 말이다.
과수원을 지나 10여분을 오르면 임도가 시작되고 임도를 따라 조금만 오르면 제법 넓은 평지를 지나 살짝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확 트인 대청호와 다도해를 연상시키는 산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도 고를 겸, 이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길을 들어 바라본다. 볼만하다. 왼쪽으로는 회남대교를 지나 어부동과 방아실로 이어지는 도로가 마치 숲 속 오솔길처럼 가늘게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문의를 거쳐 신탄진으로 이어지는 대청호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만난 어떤 분은 여기가 마치 중국의 계림과 흡사하다고 감탄을 해 댔을 정도다. 물론 계림보다는 못하겠지만 감히 비교라도 할 만큼의 경관이 바로 집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우리 부부가 이곳을 지나는 시간이 저녁 무렵이라서 물에 담긴 낙조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 더욱 좋다. 대청호를 지나온 바람이라도 한줄기 뺨을 어루만져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여기에 금상첨화가 한 가지 더 있다. 우리 부부가 걷는 길이 얼마 전부터 노란 꽃으로 뒤덮여 꽃길을 이룬 것이다. 아무리 오가는 사람이 적다고 해도 도로 가운데 일부러 심었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길 옆에 심은 금계국의 씨앗이 날려서 도로를 덮은 것이리라. 봄부터 새싹들이 가끔씩 머리를 내밀던 것을 못 본 것은 아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길을 수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붉은 대청호의 낙조를 바라보며 노란 꽃길을 걷는다.
대청호를 바라보는 조망과 꽃길만으로도 충분하련만, 여기에 뜻밖의 보너스가 또 있다. 길 가에 복분자와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검붉게 익어가는 복분자의 달달한 유혹을 그냥 지나칠 재간은 없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심조심 따서 입에 넣는다. 처음에는 한 두 개씩 따서 입에 넣었는데 워낙 많다 보니 이것도 바쁘다. 오른손으로 따서 왼손에 담아 한꺼번에 입에 쓸어 넣는다. 깊고도 오묘한 단맛이 입에 가득하다. 한편으로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맛있는 과일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저 따 먹으려니 복분자 덩굴에게 미안한 것이다. 셈을 치러야 할 텐데, 값이 매겨져 있지도 않고 돈을 받을 것 같지도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값을 치를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복분자 입장에서는 누군가가 따 먹고 멀리멀리 씨앗을 옮겨주라는 뜻에서 과일을 매달았을 터이니 결국 씨앗만 퍼뜨려주면 그게 값을 치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복분자에게는 불행하게도 수세식 화장실을 쓰고 있어서 먹은 씨앗을 옮길 수는 없으니 손으로라도 퍼뜨려 주기로 했다. 맛있게 먹고 나서는 몇 개를 숲 사이로 던져주는 것으로 값을 치른다. 물론 잘 먹었다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말이다.
복분자를 지나고 나면 이번에는 영지버섯이 기다리고 있다. 진시황이 구하려던 불로초라는데, 이 귀한 녀석들이 산책길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를 내밀고 있다. 사실은 장마가 시작되고 며칠 후에 발견했지만 좀 더 자라라고 기다려온 녀석들이다. 그새 남의 눈에 띄면 어쩌나 조금 걱정도 했는데 무사한 걸 보면 아무래도 이 멋진 산책로를 찾는 단골손님이 우리 부부밖에는 없나 보다. 팔려는 상인은 많은데 손님은 둘 뿐인 격이라, 어쩐지 채 익지도 않은 산초와 개암이 자꾸만 눈 맞춤을 시도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임도를 벗어나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솔길이라고는 하지만 둘레길로 관리가 돼 있어서 걸을만하다. 간혹 성급한 칡덩굴과 잡목들이 손을 내밀기도 하지만 걷는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고 가파른 오르막에는 나무로 계단까지 만들어져 있다.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나면 정상에 멋들어진 이층 팔각정 전망대가 지어져 있다. 우거진 참나무 사이로 멀리 속리산과 구병산 줄기, 대청호와 피반령이 보인다. 이 멋진 길과 전망대가 우리 부부의 저녁 산책을 위해서 세워진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우리 부부만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점점 찬란하게 붉어지는 서쪽하늘도, 계림에 비교할 만큼 아름다운 대청호도, 가끔씩 불어주는 시원한 한줄기 바람도 모든 것들이 완벽한 세팅을 이루어서 말이다. 속리산과 대청호가 어우러진 보은군 회인면에 자리 잡은 것이 어쩌면 신의 한 수였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