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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웅섭 Dec 25. 2021

3박 2일,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백수의 여행법

시 때문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단출하게 짐을 챙기던 내가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매주 산행을 함께하는 형님이 카톡으로 보낸 시 한 편을 읽는 순간, 갑자기 제주 여행에 운명과도 같은 목적이 생겼다.



거산호 2                 김관식


오늘, 북창(北窓)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太古)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 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 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냄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같은 산 정기(精氣)를 그리며 산다.



그래, 그리운 한라산을 만나러 가자.

옹졸하게 쪼그라진 좁은 가슴에 한라산 큰 정기를 가득 채워오자.

검푸른 겨울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차가운 자유를 깊이 마셔보자.

그렇게 시를 가슴에 품고 제주여행에 나섰다.




 그런데 이번 제주도 여행에는 한라산 말고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으니 바로 백수의 여행법을 실천해보자는 것이었다. 백수의 여행은 직장인의 그것과는 출발선부터 다르다. 백수는 우선 시간은 많고 돈은 적다. 은퇴 전에도 돈이 여유롭던 적은 없었으나 백수가 되고 나서 수입이 1/3로 줄어들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절약은 필수조건이다.  그런데 돈과 시간은 상당 부분 대체효과를 지닌다. 짧은 시간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돈을 더 써야 하고, 돈을 덜 쓰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더 투자하며 된다.  다행히 시간은 많다. 백수라도 이런저런 일정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지인들과 둘레길을 걷거나 취미생활을 하는 일정들이니 사실상 꼭 해야 하는 일은 없는 셈이다. 돈은 줄이고 시간을 늘리는 여행, 바로 백수의 여행이다.


  아내와 함께 설렁설렁 짐을 챙기고 오후 세 시에 청주공항을 향해 출발, 오후 늦은 비행기인 데다가 집에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공항이고 보니 느긋하고 여유롭다. 차는 공항에서 멀지 않은 청주 북부권 환승주차장에 주차하고 카카오 택시를 호출했다. 환승주차장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고 택시비가 5,500원이니까 오는 날 택시비까지 쳐서 1,1000원에 며칠이고 차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청주공항 주차료가 하루에 10,000원, 그리 비싼 편은 아니지만 백수에게 주차료 30,000원 절약은 적지 않은 금액이다.


 여행 일정도 백수답게 3박 2일로 잡았다. 아니, 3박이면 4일이지 어째서 2일이 되느냐고 궁금해하겠지만 요건 백수만의  여행 팁과 독특한 셈법에서 탄생한 말이다. 우선 가는 날은 오후 늦게, 오는 날은 아침 일찍 비행기표를 끊었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피하는 시간이라서 값이 싸기 때문이다. 저가 항공 기준으로 청주에서 제주까지 정상 항공요금이 9만 원 선인데 이렇게 하면 일인당 25,000원 정도면 구할 수 있다. 아내와 두 사람이니  둘이 합치면 12-3만 원 정도, 왕복으로 치면 25만 원가량이 절약된다. 물론 숙박비와 식비가 추가로 들어가지만 절약되는 돈에는 훨씬 못 미치니 그야말로 절약 꿀팁이다.

 돈은 그렇다고 치고 오가는 날 다른 일을 못하니까 여행 일정에 넣어야 하지 않느냐, 그런데 그건 직장이나 사업으로 바쁜 사람들의 셈법이다. 백수의 시간 계산은 좀 다르다.  가는 날과 오는 날은 공항에서 숙소를 오가고 비행기를 타는 시간, 본격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이니 여행기간에서 뺀다.  별 할일없이 시간은 많고 돈은 적은 백수에게 여행 준비를 하고 공항까지 이동하는 시간들은 그 자체로 즐거운 놀이이니 절대로 계산에 넣어야 할 시간비용이 아니다. 이렇게 독특한 백수식 계산법에 의해서 3박 2일이라는 요상한 여행기간이 탄생했다.

 5시 50분, 청주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가볍게 하늘로 치솟는다. 창가에 앉은 아내는 온몸으로 창 밖을 내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아니, 처음 가는 제주도도 아니고 외국여행도 아닌데 촌스럽게 난리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코로나 전에 스페인을 다녀온 것을 마지막으로 비행기라고는 2년 만에 처음 타 본다.  예약했던 베트남 여행은 코로나가 시작되자 스스로 포기했고, 몇 차례 제주도 여행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확진자가 늘어대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기를 2년, 확진자는 7,000명대로 사상 최대치인데 백신도 맞았겠다 배짱이 늘어서 처음 제주도 여행에 나선 것이다.

 한 시간 만에 제주 공항 도착, 셔틀버스를 타고 렌터카 사무실로 직행한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예약자는 달랑 우리 부부뿐이다. 1분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키를 받았다. 렌터카는 월요일 저녁 7시 - 목요일 아침 8시까지 61시간에 56,000원, 경차에 완전면책 보험이 포함된 가격이다. 여기에 휘발유값 2만 원이 추가됐으니 8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3박 2일간 자가용이 생겼다.

 농협 마트에 들러  반찬과 간식거리를 몇 가지를 샀다. 고구마 3kg  1박스, 귤 5kg, 계란 10개, 막걸리 한 병, 플레인 요구르트 2리터(요건 좀 많아서 남은 것을 집에까지 싸 왔다)......, 대충 5만 원 정도가 들었다. 에어비앤비에서 김녕해수욕장 부근에 하룻밤 39,000원짜리 숙소를 잡았는데  도착해보니 취사시설과 넓은 욕실까지 갖춘 딱 좋은 방이다. 게다가 겨울철에 평일이고 보니 한적해서 좋고 주인도 아주 친절해서 그만이다.

 식사는 대충 이런 식이다. 아침으로는 집에서 싸온 만두소로 김치만두를 만들고 떡을 넣어 떡만둣국을 끓였다.  거기에 과일과 요구르트를 후식으로 먹고 커피까지 내려 마셨다. 서버가 없어서 대신 밥공기에 젓가락을 걸쳐놓고 드립 했지만 이것도 여행의 맛이거니 생각하면 그만이다.  간식으로는 고구마와 계란을 삶아 귤과 함께  배낭에 넣고 다닌다. 얼마 들이지 않고도 아침과 점심식사까지 한방에 해결했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럽게.


 8시쯤 느긋하게 눈을 떠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는 씻고 먹고 숙소를 나서면 10시 전후, 이때부터 오후 2-3시까지 대략 4-5시간을 올레길을 걷는다. 중간에 배고프면 아침에 싸온 간식과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대신 이른 저녁은 외식을 하는데 대략 만원 선이면 생선구이나 김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술이 마시고 싶으면 마트에 들러서 막걸리 한 병에 포장된 방어회 12,000원짜리를 사서 숙소에서 마신다. 원래 술이 약한 나는 막걸리 한두 잔이면 딱 좋다. 한적한 제주도 바닷가에서 아내와 단둘이 술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그러나 최대한 돈을 아끼는 것만으로 백수의 여행법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돈을 아끼되 여유와 행복은 훨씬 더 깊게 느끼고 누리기,  값싼 숙소와 식사에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즐기기, 그리고 때로는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멋진 카페에서 핸드드립 커피와 스콘으로 낭만을 즐길 정도의 여유도 필요하다. 물론 이런 내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는 없는 일, 이번 제주여행은 어려운 백수 여행에 겨우 첫 발자국을 내딛는 시작에 불과하다.


 멀리 그리운 한라산과 인사를 나눈다. 신혼여행  이후 내 인생 40년의 중요한 순간들을 묵묵히 바라본,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켜봐 줄 한라산이 고맙고 듬직하다. 맑고 시린 겨울바람으로 복잡한 가슴을 씻어본다. 한적한 바닷가 길을 꿈처럼 걸어본다. 이렇게 한적하고 좋은 제주도 여행을 왜 그동안 뜸 했을까, 앞으로는 일 년에 서너 번씩, 조금 더 긴 시간을 잡고 자주 오자고 아내와 약속한다. 물론 시간을 많이 쓰고 돈을 적게 쓰는, 그러나 내면의 행복과 감사는 더 깊어진 백수의 여행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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