빰쁠로냐(Pamplona) – 뿌엔떼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10월 22일
제법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빰쁠로냐는 사실 하루쯤 더 묵으면서 천천히 둘러 볼만한 곳인데, 왠지 일정에 맞추어 걷는 걸 빼뜨리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관념, 그리고 이제 눈에 익고 익숙해진 순례자 그룹들과 헤어지기 싫은 심정, 뭐 이런 것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그냥 출발했다.
성 안에 위치한 숙소를 빠져나와 멋진 야경, 아니 새벽경의 시청을 지난다. 여긴 시청 건물이 문화 재로구먼, 괜히 부럽다. 야광표시가 달린 작업복을 똑같이 입은 사람들이 물차를 대놓고 소방호스로 길을 청소하고 있다. 도시가 왜 그리 깨끗한 가 했더니 이런 수고가 있었구나. 성을 나와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니 성 밖은 현대식 스페인 도시다. 어느새 출근시간, 도시가 활기차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저들처럼 매일 아침 출근했는데, 이제 한가로운 순례자가가 되었구나.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조금 으쓱하고, 아주 조금은 부러운 마음도 생긴다.
새벽 무렵, 빰쁠로냐 시청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공원을 걷고 있을 즈음에 바욘에서 만났던 조지를 다시 만났다. 사실은 두 번째가 아니라 5번쯤 만나거나 같은 숙소에 묵었고 이번에 다시 만난 것이다. 한 번은 길거리에 떨어진 조지의 버프를 주워서 돌려주기도 했고 길가에서 점심을 때우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조지가 비스킷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짤막하게나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길동무가 돼 버린 사이다. 같이 걷다가 공원을 벗어날 즈음 조지가 함께 사진을 찍잔다. 그도 우리 부부가 이제 친구로 느껴지나 보다.
조지뿐만 아니라 며칠 걷다 보니 눈에 익은 길동무들이 제법 생겼다. 가끔씩 인사를 나누다가 조금 더 친해지면 어느 나라인지 국적을 묻고 이름을 나눈다. 걷는 속도가 달라서 주로 그들이 우리 부부를 추월하곤 하지만 어차피 비슷한 마을의 몇 안 되는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니 저녁에 또 만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며칠씩 안 보이다가 잊을 만할 때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가는 1차원의 여행이다. 드물게 길이 두 개로 갈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다. 식당도 숙소도 대부분 순례길을 따라 고만고만하게 자리 잡고 있다. 큰 도시라도 다를 게 없다. 어차피 순례길은 정해졌고 순례자들은 그 길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키 큰 헨리가 다가와 사진을 찍자며 허리를 숙인다
순례자들은 정해진 길을 느슨하게 무리를 이루어 걷는다. 빨리, 혹은 천천히 걸어서 앞뒤의 다른 그룹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무리로 순례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살이도 비슷하다. 나를 중심으로 가족과 직장동료, 친구, 이웃, 한국사람, 조금 더 넓혀본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모두 비슷한 경로를 비슷한 시간대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인생을 순례길에 비유하는 진짜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런 점에서도 순례는 우리 삶 자체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4일 차, 지금까지 100km쯤 걸었다. 매일 20km 넘게 걷는다. 피곤하기도 한데 재미도 붙는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발에 물집 하나 잡히지 않았다. 우선 두꺼운 등산양말과 편한 트레킹화를 신었고 특별히 멋진 노르딕 스틱을 양 손에 들었다. 스틱은 사람의 체중을 30%나 받아 준단다. 스틱을 짚으면 무릎과 발목 관절에 무리가 덜 간다는 말이다. 또 약간 상체를 숙이게 되니 척추에도 부담이 덜 간다.
노르딕 워킹은 걸을 때 스틱을 발뒤꿈치 쪽에서 약간씩 뒤로 미는 게 중요한데, 추진력도 생기고 상체운동도 된다. 서서 걷되 네발로 걷는 것이다. 다만 한 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스틱을 짚는 게 필요하다. 이게 익숙하지 않으면 그냥 들고 가거나 아주 가끔씩, 혹은 한쪽만 짚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스틱은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짐이 된다. 스틱을 리드미컬하게 짚는 요령이 있는데 그건 바로 발로 걷는 게 아니라 손으로 걷는다고 생각하는 거다. 손에 마음을 두고 손으로 걷는다고 생각하면 발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를 이끄는 김영식 대장님이 노르딕 워킹을 가르쳐 주시고 스틱도 사 주셨는데 그 스틱이 이번에 단단히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 부부에게 비장의 무기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바로 바셀린이다. 아내의 제안으로 바셀린을 준비했는데 이걸 아침에 출발하기 전과 길에서 쉴 때 중간중간 발라준다. 발가락 사이와 발바닥, 그리고 발꿈치까지 듬뿍, 마사지를 겸해 바른다. 그리고 지친 발에게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는다.
“발아, 힘들지?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내가 중간중간 발라주고 비벼주고 응원할 테니까 한 달만 잘 버텨보자”
바셀린을 바르고 걸어보면 양말 속에서 발이 약간씩 미끄러지는 느낌이 든다. 발과 양말의 마찰이 줄어들어 물집이 덜 생기는가 싶다. 길가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셀린을 바르는 모습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는 지저분해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우리 부부는 물집 한 번 잡히지 않았다.
풀 숲 사이 오솔길을 지나고, 바람이 옷깃을 날리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른다. 들판이 끝나자 멀리 높은 언덕이 나타나고 그 위로 수십 개의 풍차가 조그맣게 보인다. 워낙 바람이 많으니 풍력발전의 적지이겠다 싶다. 저런 풍차야 대관령에서도 울진에서도 본 적이 있지만 특별히 돈키호테의 고장, 스페인에서 보니 느낌이 다르다. 늙은 나귀를 타고 창을 꼬나들고 거대한 풍차에 달려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속으로 킥킥대다가 아내에게 실없는 농담을 했다.
“여보, 여기 왜 이렇게 바람이 센 가 했더니 이제 알겠네.
저렇게 큰 선풍기를 여러 대 돌려대니 바람이 셀 수밖에 “
이 정도의 농담에는 이미 면역이 된 아내가 그저 빙긋이 웃는다. ‘음, 니가 아직 견딜만하구나’ 하는 눈치다.
절벽 옆으로 매달린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른다. 직각으로 솟은 언덕에는 돌 사이로 어른 주먹보다 큰 동그란 돌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돌이 돌을 품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들이 콘크리트 반죽이라도 해서 세운 듯하다. 이게 바로 학창 시절, 지학 시간에 배웠던 역암 이리라. 아마도 옛날에는 이곳이 강바닥이었겠지. 흙과 자갈이 섞인 채 땅 속에 묻혀 압력으로 돌이 되고, 다시 지각변동으로 언덕이 되었겠다 싶다. 발밑을 보니 절벽에서 떨어진 동그란 돌들이 지천이다. 혹시나 떨어지면 어쩌나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올랐다.
언덕에 올라보니 바로 용서의 언덕이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여행기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바로 그곳이다. 십여 명의 어른과 아이,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걷거나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모두 몸을 앞으로 숙이고 옷깃과 깃발을 나부끼며 세찬 바람을 마주 보고 걷고 있는 실루엣인데, 실제로 거센 바람이 부는 탁 트인 높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으니 제대로 실감 난다. 이곳이 왜 용서의 언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각품의 모습이나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고난의 언덕이 더 맞을 성싶다.
어쨌거나 이름이 용서의 언덕이니, 나도 누군가를 용서해 볼까 싶어서 이리저리 대상을 물색해 봤다. 살면서 서운하거나 부딪힌 사람은 많지만 뭐 누군가와 원수지간이 된 적은 없는 것 같다. 화해는 할망정 용서까지 할 일은 없는가 싶다.
바람에 축축함이 묻어온다 싶더니만 어느새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누굴 용서할까 더 이상 고민할 상황이 아니다. 얼른 판초 우의를 꺼내 입고 간식과 물을 마시고는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더 조심스럽다. 경사도 제법인 데다가 동그란 돌들이 쫙 깔려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밑을 보고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무릎과 발목에 무리도 많이 간다. 그나마 스틱으로 지탱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겨우 4시간쯤 걸었는데 에휴, 오늘은 그만 걷고 싶다.
길가에서 나물도 뜯었다. 스페인까지 와서 웬 나물인가 싶지만 한적한 시골길 옆에 익숙한 풀이 보이기에 자세히 보니 갓이다. 맞나 싶어서 조금 입에 넣어보니 코가 싸 하고 눈물이 맺히는 게 갓이다. 집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으니 매운맛을 먹고 싶을 때도 지났다. 아내와 쭈그리고 앉아 한 주먹 뜯어 배낭에 넣었다.
오늘의 목적지 레이나에 도착했다. 레이나는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조그마한 도시다. 예약한 숙소를 찾아 방을 확인하고 쇼핑 겸 거리 구경을 했다. 쇼핑 목록을 보자면 바게트, 감자, 양파, 마늘, 달걀, 플레인 요구르트, 쇠고기 스테이크나 하몽(훈제 돼지고기), 간식거리, 쌀....... 쌀은 1kg 포장인데 숙소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미리 확인하고 없을 때만 사면되고 요구르트와 바게트는 아침 식사용이다. 바게트에 하몽, 과일 슬라이스, 채소를 넣고 요구르트를 뿌리면 간단하고도 훌륭한 아침식사가 된다. 쌀로 밥을 지어서 저녁에 먹고 남은 밥이나 누룽지를 끓여서 대신할 수도 있다. 과일은 내가 워낙 좋아하니까 거의 매일 2kg 이상씩 사 먹었다. 저녁에도 아침에도, 배낭에 넣고 걸으면서도 늘 과일이다. 이렇게 거하게 장을 보면 대충 25-30유로쯤. 순례자 정식이 일인당 12유로니까 사실 가격은 사 먹는 거나 비슷하다. 그러나 숙소에서 요리를 하는 재미가 있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또 아침 식사까지 해결되니 결국은 이익이다.
아참, 중요한 걸 빼먹었다. 바로 와인.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 점심에 한잔, 저녁에 한잔 혹은 두 잔씩 거의 매일. 술 좀 먹는 사람들은 그게 뭔 뉴스거리냐 싶겠지만 나에게는 평생 처음 이변이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가빠진다. 친구들은 아예 나를 포기했고 직장에서도 술에 관해서는 거의 장애인 수준이다. 그런 내가 두 달간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니 아내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이변이 따로 없다.
핑계는 있다. 우선 와인 값이 너무 싸다. 마트에 가면 와인 한 병에 2-10유로쯤, 내가 고르는 건 보통 5유로 선이다. 우리 돈으로 치면 6-7천 원이라는 건데 이걸 마셔보면 맛이 썩 훌륭하다. 검색을 해 보니 와인이 우리나라에 수입되면 현지가의 10배 정도가 된다는 기사가 보인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한국에서 6-7만 원짜리 와인을 먹는 셈이다. 식당에서는 아예 와인이 공짜다. 식사에 포함되어 한 잔씩, 어떤 지역에서는 아예 한 병을 내준다. 상황이 이러니 와인을 마시지 않을 재간이 없다. 더구나 몇 시간을 걷고 나서 먹는 맛있는 저녁식사, 식사 후 아내와의 두런두런 대화, 어쩌다 순례자들과 어울리는 재미, 이 모든 것들이 와인이 한 잔 들어가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술과 담쌓고 살아온 내가 와인 킬러가 되었다.
채소에 과일에, 아까 뜯은 갓을 손으로 뚝뚝 잘라 넣어 요구르트를 뿌리니 코가 뻥 뚫리고 속이 다 시원하다. 아내와 지은 저녁밥을 맛있게 나눠먹고 와인도 두 잔이나 마시고 나니 이런 행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