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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Sep 30. 2023

엄마에게, 서른아홉 번째 추석을 보내고

엄마, 나야. 

엄마의 딸.

서른에 결혼 후, 내 아이들이 돌을 맞이할 때까지 온 세상의 중심을 엄마에 두고 살았던 딸.


아이들이 두 살이 된 이후 몇 년간 셀 수 없는 날을 엄마와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했어.

엄마와 아빤 더 이상 기억나지도 않을 사소한 일들을 들추어내며 지금 내 육아가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유에 가져다 붙였어.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엄마와 아빠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날 집어삼키더라고.

나도 어쩌지를 못해 엄마에게 전화 걸어 따지듯이 묻고 울었던 날이 기억나.


그런데 올해는 그렇지가 않더라.

참 이상하지.

세상의 중심이 자식이라며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 줄 것 같던 엄마와 아빠가 실은 본인도 모르게 자기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단단하게 마주하고 나니 나도 맷집이 좀 생겼나 봐.

전에는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질 때마다 '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부모님을 위해 나 자신도 희생해야 한다'라며 스스로를 내버린 나를 향한 분노가 견디기 어려웠는데 말이야.

내가 맞이하는 서른아홉 번째 추석.

2박 3일 동안 엄마와 함께 있으면서 난 또 익숙한 버려짐에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게 엄마와 아빠의 딸로 태어난 당연한 외로움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이 감정에 날 희생양으로 내세우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그러고 나니 엄마와 아빠는 엄마와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시공간을 공유하는 편안함을 찾게 된 것 같아.


어릴 적, 아니 평생을 갖고 싶었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참 고팠는데 그 사랑 이제 내가 나에게 주고, 내가 내 아이들에게 주면 될 일이더라.

은이가 쓴 편지에 자주 등장하는 말, '엄마가 화를 내도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란 문장이 뼈에 박히는 요즘이야.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과 아이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 중 크기를 비교하자면 뭐가 더 클까?

방법이야 다르지만, 그 무한한 크기는 아이들이 내게 주는 사랑이 훨씬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난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일들이 보이는데 아직 어린아이들에게는 나만 보이고, 나랑 함께하고 싶은 일만 보이거든.

엄마에게서 아주 조금 더 독립하고 나니 내 아이들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하나 봐.

내가 엄마에게 그랬듯이 내 아이들도 나만 바라보고 있고,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내 눈에는 아이를 둘러싼 다른 것들이 더 보이거든.

전에는 엄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딘가를 향해있는지 늘 궁금하고 그 대상이 내가 되고 싶었는데 (엄마는 행동과 달리 그게 나라고 늘 말하니 어린 나는 혼란스러웠어) 이제는 내가 엄마 입장이 되고 보니 엄마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조금을 알 것 같아.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함, 세상 유일한 나의 핏줄에게 걸어보는 얕은 희망.

전에는 이걸 옳거나 그른 것으로 판단하고 원망했는데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

그게 엄마와 아빠의 최선이었음을 아니까.

은이와 연이도 나를 바라보면 그렇겠지?

난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는데도 애쓰지 않는 대부분의 순간에는 나 또한 일상의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막연한 미래의 불안을 안고 살아가니까.


많이 작아진 엄마와 아빠.

오늘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나를 향해 "엄마는 뒤돌아서 눈물 훔치는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흘리는 엄마에게 "난 친할머니가 좋으니까."라고 대꾸했어.

오늘 일곱 살 내 아이들과 아빠가 함께 있는데, 여덟 살 딸이 밥 안 먹는다고 아침부터 집 밖으로 쫓아낸 젊은 날의 아빠가 떠올라서 눈을 질끈 감았어.

참 이상하지.

이전 같았으면 딸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엄마가 미웠을 테고, 삶의 고단함을 딸을 향한 불안으로 토해낸 아빠가 원망스러웠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어.

그냥 그게 엄마고, 그냥 그게 지난 일이니까.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아니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야.

있었던 일이 지워지지 않고

흘러가는 다름이 인지되지 못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오늘 서른아홉 번째 나의 추석은 지난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단단했어.

엄마와 아빠의 인생은 엄마와 아빠의 것으로

나의 과거와 미래는 나의 것으로 가져왔거든.

스치듯 순간을 공유하며 현재라는 것에 함께 했지만

우린 스치듯 과거를 공유했고, 스치듯 미래 어느 날을 공유하는 것뿐일 테니.

어제와 내일에 매이지 않고

공유하는 지금에 집중했나 봐.


엄마, 편지가 길었지?

생각 많은 딸이 2박 3일의 여운이 정리되지 않아

이렇게 글을 썼어.


서른아홉 번째 추석도 우당탕탕 함께 해 주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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