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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풀풀 Apr 03. 2024

필기구의 조합이 이끄는 곳

손바닥만 하거나 손바닥과 손가락을 합친 만큼이거나 두 손을 합친 크기이거나, 하얀색이거나 연노랑색이거나 하늘색이거나, 매끄럽거나 오돌토돌하거나. 선호하는 종이의 크기와 색, 질감은 꽤 다양한 편이다. 싱크대 상판에 늘 올려두거나 책상 위 바구니에 담아두거나 독서대 옆에 마련해 놓거나, 용도에 따른 저마다의 위치도 정해져 있다. 

유성이거나 수성이거나, 0.5mm이거나 0.7mm이거나, 매끄럽게 굴러가거나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거나. 선호하는 펜의 형태와 굵기도 다양하다. 여기에 그립감, 심의 굵기, 나무의 색까지 고려해야 하는 연필이 합쳐지면 연필꽂이 안의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렇게 다양한 종이와 펜(또는 연필)의 조합은 (비록 즉흥적으로 보일 테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로 나뉜다. 


그렇다, 난 필기도구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기도구를 수집하기를 즐기진 않는다. 잊어버리기 쉬운 장바구니 목록을 적을 때 사용하는 필기구와 읽던 책의 글귀를 적을 때 사용하는 필기구가 다르다. 흐르는 상념을 기분 좋게 적어갈 때와 격정적인 감정을 뱉어버릴 때 사용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 필요에 따라 손에 잡히는 필기도구의 조합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보다 감각적으로는 순간의 온습도, 공기의 향기, 의식해야 들려오는 백색소음들의 차이에서도 사용하고 싶은 필기구가 다르다. 습도가 높도 더운 날에는 B 심 연필과 도톰한 종이의 조합이 사각거리며 시원하고, 차가운 공기에 한기가 드는 날에는 0.7mm의 유성볼펜과 사무용지의 매끄러운 조합이 오그라든 마음을 풀어준다. 프리지어 꽃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날에는 미색 종이에 0.3mm 수성펜으로 섬세하게 적어가고, 냉장고의 낮은 소음이 거실을 채우는 늦은 밤에는 육각연필을 공을 들여 깎고서 일기장을 꺼낸다. 


필기구의 취향이 확실하다. 필기구의 조합 또한 취향이 분명하다. 그래서 직장의 책상 주변과 집에서 머무는 곳에는 연필과 펜, 포스트잇과 종이들이 놓여있다. 이렇게 곳곳에 좋아하는 필기구의 조합을 준비해 두면 언제든 어디에서든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필요해서 쓰고, 좋아서 쓰고, 화가 나서 쓰고, 슬퍼서 쓰고, 심시해서 쓰고, 그냥 쓰고. 내 상태가 어떤지를 종이 위에 펼쳐낼 수 있다. 

물론 이건 '파프리카, 두부'와 같은 물건의 나열일 수도 있고, '은행 가기, 인터넷 장보기'와 같은 할 일의 나열일 수도 있다. 아니 내가 쓰는 대부분의 글은 이런 단순나열의 리스트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시시한 메모가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쓰인 글자만 보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글자 뒤에 자리 잡은 생각은 지금 내가 바라보는 가치이자 우선순위이다. 파프리카와 두부는 '식단을 고민하는 나'이고, 은행가기와 인터넷 장보기는 '할 일이 넘쳐나서 분주한 나'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수시로 떠오르는 단어들과 문장들을 적고 분류하며 이렇게 나를 알아차려간다. 


나를 아끼려고 좋아하는 필기구를 여기저기 놓아둔다. 단어들로 꽉 찬 머릿속을 비워내고, 가슴 한복판에 가득 찬 감정을 덜어낸다. 사각거림 때로는 딸깍거림이 손 끝으로 전해지고 종이에 검은 형태가 드러난다. 곁에 둔 필기구는 나를 매만지는 도구다.





쓴다는 행위는 때론 참 어렵습니다. 

시각적으로 드러나 민낯을 마주하게 만들거든요.


쓰기가 어렵게만 느껴지는 분들께 '메모지와 연필'을 권해드리고 싶어요.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식탁 위, 출근하여 매일 마주하는 마우스 옆, 잠들기 전 핸드폰을 내려놓는 협탁 위. 

당신의 눈길과 손길이 가는 어디에든 '메모지와 연필'을 놓아보세요.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 단어를 적어보세요.


'쓰기'는 그렇게 시작된답니다.




<오늘도 쓰는 사람들>

진짜 나를 마주하고 더 단단해질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쓰는 5명의 작가가 만났습니다.
쓰기를 시작하는, 쓰기를 지속하려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와 내일을 그려보는 희망을 건네는 글을 씁니다.

글쓰기 시대이지만 글쓰기를 지속하는 사람보다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글쓰기의 시작과 시행착오, 글을 쓰며 나아가는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엮고 있습니다.

그 책은 4월 말 곧 출간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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