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을 출간하고 번아웃에 빠졌다.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내 안의 이야기를 탈탈 털어내고 부스러기만 남았다. 더 이상 무엇도 '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쌍둥이 두 딸을 독점육아하며 출근하여 일도 하고, 여가시간보다는 돌봄 노동의 시간이 더욱 큰 내가 무려 '책 출간'을 해 내기 위해 24시간을 얼마나 쥐어짜 냈겠는가. 그것도 초보 작가가 말이다.
번아웃뿐만이 아니었다. A4용지 두 장에 걸친 완결된 꼭지글을 쓰던 습관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글에 메시지를 담아야 해. 도움이 되는 정보를 넣어야 해. 정보와 경험이 함께 녹아들어야 해." 유용하게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버린 것이다. 이전에 즐겨 쓰던 가벼운 글과 짤막한 글은 오히려 글답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주변에서는 드물어진 글 발간에 여러 질문을 던졌다.
"책 나왔으면 홍보를 해야지. 왜 요즘 뜸한 거야?"
"이제 작가님으로 여러 정보를 알려달라고. 머릿속에 있는 글을 쏙쏙 끄집어내어 봐."
"다음 책은 언제 나와? 기다리고 있어."
애정 어린 관심은 채근으로 느껴졌고, 나는 더욱 굴 속으로 들어갔다.
마음속에 막연한 불안이 싹텄다. 이대로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책이 나오든, 인플루언서가 되든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책이 나오기 전 이미 수년을 이어온 나의 건강한 글쓰기 루틴이 이렇게 망가지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어떤 글을 쓰려고 할수록 손가락은 굳어졌고, 머릿속은 터져나갈 듯했다. 글이 아닌 조금 더 가벼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멈추어버린 개인 블로그의 지난 포스팅을 죽 읽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고, 어떤 글을 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게시판을 열람하던 마우스 포인트가 비공개 게시판에서 멈추었다.
"양육 기록"
그래, 이거였다. 나의 책의 시작은 이 양육 기록이었다. 하루를 쓰고, 생각을 글로 옮기고, 마음을 쏟아내며 나를 세운 이 글들. 나의 글은 기록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후로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부담스럽던 도서 리뷰도 개인 기록의 형태로 바꾸어 편안하게 올린다. 정형화된 틀을 만든다면 브랜딩의 입장에서 더욱 깔끔하겠지만, 내게 중요한 건 브랜딩이 아니라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돈이 되는 브랜딩, 브랜딩으로 시작하는 사업 등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나의 이런 기록들이 쓸모없게 보일지도 모른다. 일기 같은 기록을 구태여 공개적으로 남기는 것도 피로할 테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며 하루를 사색하고, 사소한 기록이 쌓이니 성과로 드러나고, 공개적(이지만 미미한 조회수로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으로 공언을 하는 선순환의 시스템을 맛본 이들은 안다.
기록이야말로 나를 세우는 글쓰기이자, 나를 만들어가는 글쓰기임을. 어디든 기록해 보자. 다이어리, 스케줄러, 메모지, 인스타그램 등 어디든 좋다. 보이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 나를 채워가기 위한 기록이 빼곡히 쌓이는 즐거움이 발끝부터 차곡히 쌓여갈 것이다.
<오늘도 쓰는 사람들>
진짜 나를 마주하고 더 단단해질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쓰는 5명의 작가가 만났습니다.
쓰기를 시작하는, 쓰기를 지속하려는 사람들에게 오늘도 글을 쓸 수 있는 용기와 내일을 그려보는 희망을 건네는 글을 씁니다.
글쓰기 시대이지만 글쓰기를 지속하는 사람보다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글쓰기의 시작과 시행착오, 글을 쓰며 나아가는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엮고 있습니다.
글쓰기 에세이 신간 [그녀들의 글쓰기 맞수다]가 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