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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Mar 30. 2024

MEAN GONE의 의미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


 이런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A와 이별한 뒤 A가 보고 싶을 때마다 B를 만나 하소연하다 보니 B를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 지난겨울 고통과 분노에 빠져 매일 영화를 보게 되었고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공허할 때는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영화를 보는 게 나은 것 같다. 술을 마시면 '그땐 그랬어야 했나' '만약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랐을까' 하며 내 머릿속 상영관에서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리플레이되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리플레이되고, 그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삶을 비웃게 되곤하니 말이다.


 좋은 영화가 있다고 하여 거리가 있어도 찾아가 혼자 보았다. 비교적 한적한 공간 속에서 영화는 시작되고, 심야의 침실 같은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그 빛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머릿속에 맴돌기만 했던 옛 장면들이 이중노출 된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물은 옛 기억 속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35mm 필름 특유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니 멍하니 쳐다보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니', 미친 듯이 빈틈을 일일이 메꾸려고 했던 질문들은 잠잠해지고 나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삶을 조망하게 된다.


  그러다 문뜩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는 한다.

 



 인스타그램. 남들이 다 만드는 계정의 이름이 조금 독특하면서 나를 잘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이름 '민곤'과 그 음이 비슷한 영어 mean과 gone을 결합해 의미가 없다는 뜻의 'Mean Gone'으로 정하였다. 사람이 제 이름을 따라가는 것인지, 아님 나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그대로 나돈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시절엔 형용할 수 없는 때론 심오한 이 이름이 맘에 들었다.

 

 이전에 적은 글들은 때론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나이기에 그대로 놔둔다. 왜 그러한 글(교대라는 왕국의 괴물)을 적었는가 생각해 보면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사랑이라거나 마음이라거나 슬픔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 또 태양이라든가 바다 등 영원을 떠올리게 하는 너무 크고 영속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개인의 삶보다 중요시되는 가치는 개인의 삶을 지워버린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식물학자가 된 것처럼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나의 모습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었으며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가령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정하곤 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 '인연' 또한 과거엔 부정하려 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보다 나를 잘 표현하는 이름은 없었다. 다만, 의미가 없는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살았다. 그렇기에 브런치의 매거진의 이름이 '허상의 파괴자에서 가치의 수호자로'인 것도 이상하지 않다. 언젠간 의미를 허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치롭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인연


  영화를 관통하는 '인연'은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를 하나로 묶어준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초등학생 때 만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던 나영(그레타 리 분)과 항상 나영을 그리워했던 혜성(유태오 분)은 12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았고, 그 이후 다시 12년이 다시 흘러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 속에서 감독은 105분 동안 인연을 우리 눈에 보여준다. 인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자유, 사랑,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란 걸 말이다.

 12살의 초등학생인가 아니면 성인인가? 그곳이 뉴욕인가 아님 서울인가? 진실된 사랑인가 불륜의 미화인가?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마지막에 택시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정적을 더욱 붉게 만드는 것은 두 주인공이 아니라 어떤 장애물이라도 인연 속에 통합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이들을 애절하게 만들며, 24년이 지나도, 미국과 한국 사이를 오가게 했을까.

그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녀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결혼을 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상을 타고 싶은)하고 싶은 나영(그레타 리 분)과 달리 혜성(유태오 분)은 자신에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여자친구와의 결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며 무의미한 삶. 이처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고통이 아니라 무의미이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미 결혼한 그녀를 먼 미국까지 찾아간 혜성처럼.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나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하니 말이다. 혜성에겐 나영이 삶의 의미였지마는 나영에겐 혜성이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의미를 부정하던 내가. 너무 크고 영속적인지라 생각할 가치도 없다던 내가 언제부터 의미에 대해 긍정하게 됐을까. 아니 애초에 부정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가령 의미를 극도로 부정했던 Mean Gone이라는 이름 자체도 부여된 의미이니 말이다. 누군가에게 자유로운 존재로 보이고 싶었기에,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기에 나 조차도 내가 부여한 거대한 의미 아래 살아왔다.

 

 의미는 우리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때론 체념과 절망 속에서도 버려져 쓸려 가고 이리저리 끝내 낮게 흘러 다니는 빗물처럼 끝내 사라지지 않고 깊은 곳에 모인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당신이 만들지 않았고 그것은 내 안에서 만들어졌으며 나를 떠난 적이 없다. 내 안에 장기처럼 붙어서 나를 나답게 하는 것. 이별이란 태풍이 모든 것을 휩쓸고 망가뜨릴수록 어떤 사랑은 괴물처럼 부풀어 올라 자신을 과시하고 나는 때로 그것이 무섭다고, 나는 때론 그런 사랑이 두렵다. 그런 사랑이 무섭기 때문에 의미를 부정하고 외면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패 작전을 등에이고 힘껏 실패하기


 의미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하며 나를 나답게 만들기도 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괴물처럼 부풀어 오르기도 한다. 때론 자신이 가치롭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 가면을 들추었을 때 추악한 몰골을 하고 있다. 얼마나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시작한 연애의 그 끝은 나의 끝없는 밑바닥인 것처럼. 추악한 허상과 변질된 가치는 그 모습이 닮았기에 구분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인연을 더욱 가치롭게 만드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었다. 어릴 적 만남이 12년 만에 연락돼, 항상 10시가 넘어 일어나던 주인공이 아침 8시에 번쩍 눈이 뜨고, 화상전화를 하기 위해 집에 일찍 귀가하는 두 주인공들처럼, 그리고 24년 만에 조우하는 두 사람처럼. 영화의 결말은 이별이지만 셀린 송 감독이 말하는 '인연'은 그 결말이 아닌 둘의 대장정이었다. 그 끝이 하물며 실패라면 어떠한가. 그 과정 자체가 우리들을 살아있다고 믿게 해 준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 과정은 마치 실패 작전을 등에이고 깊숙한 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실패 작전을 등에이고 힘껏 실패하기' 이것이 실패의 딜레마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MEAN GONE'이라는 이름의 '의미 없음'은 시간이 지나 빛바랜 가치를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일련의 과정 끝에 무엇이 서 있는지가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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