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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Nov 17. 2022

시선의 몰락

배반

 나는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한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럴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지.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하다.


 한 세계가 어그러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무너지고 있는 세계만을 바라볼 뿐 이면의 새로 건설되는 세계는 보지 못한다. 공허를 가로지르는 중립적인 시선, 어둠만이 배인 눈동자. 절정의 순간에 몰락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이 왜 중요한지 묻는다면, 몰락은 패배이지만 그 선택 자체는 패배가 아님에 있을 것이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웃는다. 그렇기에 가슴을 찬미하는 세계는 그들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한가 그리고 아름다운 삶인가.




  산다는 것은 보는 것을 의미한다. 봄으로써 세계와 말하고 미소 짓게 되니.


 인간의 유형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은 환자들이다. 백내장 환자 A. 감퇴한 시력은 사물을 흐리게 하며  또한 구분하기 어렵게 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안개가  것처럼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녀의 인사에 대꾸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미소를 보내지 않는다. 그녀가 말을 걸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는 시력과 함께 세상을 잃어가는 중이다. 점차 세상은  색을 잃어가다가 끝내 그녀의 세상이 되길 멈춰 버린다. 완전히 자기 자신 속에, 자신의 고통 속에 갇혀 버리게  것이다.



 끝도 없는 안갯끝에 서 있는 건 또 다른 환자 B. 그 또한 계속되는 패배에 세계에 등 돌린 지 오래다. 두 상처의 만남은 새로운 감응을 부른다. 그 우연적 만남은 비가시성의 두 가지 재현을 불안정한 중첩 속에서 서로에게로 이끈다. 현기증 날 정도의 상호 근접은 그들을 안쪽 깊숙이, 입체적 공간으로 인도한다. 칠흙보다 깊은 어둠속 '쨘' 하고 켜진 가로등은 너무도 따숩다.



 회피의 공간이 형성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이웃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그는 그녀의 세계에 동참했다. 그녀는 그의 목소리에 대답했지만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단지  차이일 뿐이다.

 


 입체적 공간이란 응당 그 경계를 지닌다. 경계의 끝은 멀리 보여서는 안 되지만, 또 가깝고 넓어 보여서도 않된다. 그 무대에 올라서면 그들만의 자유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춤을 추기도 하고, 규칙이라는 이름에 침을 뱉으며 비웃기도 하며, 서로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 세상을 등진 이들은 세상의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진다. 그들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긴긴밤 속에서 이들은 오직 그들만을 위한 추억을 새긴다.



 다만, 이들에게 제일 위험한 것은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이다. 시야는 닫혀있어야 하며. 귀가 열리지 않아 생각이 경계 너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이들에게 배신이란 자각, 즉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남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선녀와 나무꾼>도 사실 둘의 결핍으로서 시작한다. 결핍에 의한 갈증, 이는 만남을 위한 선결 조건이지 않은가? ‘날개옷’의 부재는 그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선물하지만 그것의 존재는 아이러니컬하게 구성원의 배반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사실 선녀에겐 날개옷이, 환자에겐 병의 치료가 급선무였던 것이었나.



 배신. 우리 어린 시절부터 아빠와 교사들은, 배신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한 것이라고 누차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산다는 것은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력을 회복한 백내장 환자에게 회피의 공간은 이제 의미가 없다. 눈과 귀가 열린 애매한 방문자는 부동의 균형 상태에 들어갈 듯하면서 동시에 나갈 듯하다. 가령 움직이지 않더라도 그녀가 풍기는 어두운 색조의 이미지는 자기 육체로 배반을 실감 나게 되풀이한다. 그녀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배반은 승리처럼 그녀를 유혹했고, 공간의 경계 속 흐릿하고 매우 작은 실루엣들은 그녀의 크고 건장한 모습에 밀려난다.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묵직한 파도 한 번에 무너지듯, 이렇게 기존의 세계는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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