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마르(la mar)
이런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소년은 소녀를 만나, 큰 은혜를 받지만 또 많은 것을 빼앗기기도 한다. 소녀의 드세기가 때론 폭풍처럼 몰아치지만 그것을 포용한 소년은 마침내 어른으로 거듭난다. 이는 비단 남녀에 국한된 이야기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인류는 자연을 규제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통제는 문제를 낳고. 이는 더 큰 통제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통제의 끝엔 통제를 통제하는 인간만이 남는다. 이들에게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만큼 골치 아픈 일이 없다. 소년은 폭풍마저 포용할 때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며, 자연은 통제가 아닌 이해하고 교감할 대상이라는.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인가. 삶의 당연한 가치들을 당연하지 않게 제시하는 게 그들의 의무다. 그들은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하나의 점을 수백, 수천 가지 도막으로 나누어 우리에게 내놓는다. 헤겔의 말을 조금 변형하자면 좋은 예술은 음악과도 같다. 음악은 우리의 내면세계에 수천가지 도막의 언어를 부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영혼의 상태를 관객의 심중에서 일깨우게 한다. 요동치는 영혼은 생의 근원적인 질문들과 맞닿아있어 질문의 끄트머리만 건드려도 전체가 자극을 받아 진동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사랑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태도로 삶을 마주해야 하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말이다.
9일 「아바타: 물의 길」 내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곳에서 감독인 제임스 캐머런과 주인공 샘 워싱턴(이하 제이크 설리)의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영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제임스 캐머런은 "전편과 관통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다"라고 말하며, 이어서 그는 "환경 보전이나 해양 보존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는 말로 맺는다. 샘 워싱턴 또한 감독의 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희생하지 않을 게 없다."라며 전작에선 "제이크가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고 사랑을 만나는 여정을 했다면, '물의 길'에서는 소중한 존재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는다"라는 힌트를 넌지시 남겼다. 이 두 가지 서문을 통해 우리는 「아바타: 물의 길」 이 어떤 가치를 말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철학이나 자연을 다루는 책을 읽을 때, 나만의 요령이 있다. 책꽂이에서 『노인과 바다』를 꺼낸다. 학창 시절의 나는 장편소설이라기엔 좀 짧지만, 단편이라기엔 상당히 긴, 이 책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노벨상은 수여한 스웨덴 한림원은 이 작품을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룬 작품.'이라 평했다. 다만, 열일곱 살 무렵의 나에겐 선함과 존경심이라는 단어는 들어오지 않았고, 또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 같은 크고 영속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았다. 『노인과 바다는』 사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연인의 마음이 가닿은 흔적들에 대한 1인칭 보고서라는 것을. 책에서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이 일이 꿈이었다면 좋았을 걸. 또 이 고기를 잡지 않았다면 좋았을 걸.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래서 엉망이 되어 버렸던 거야." 이 구절 속 ‘고기’를 ‘여인’으로 치환해보자. 그렇게 읽어보면 한 여인에 대한 노인의 애절함과 미안함이 텍스트 그대로 전해지게 된다. 그 이후 김춘수의 시를 읽는 것처럼 진리나 자연에 대해 읽을 때 여인으로 바꿔 읽곤 한다. 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바다에도 영향을 미치지,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노인은 늘 바다를 '라 마르'라고 부른다. 이는 여자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사람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한다. 대신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였으며 바다를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불렀다. 그럼에도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 생각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면서. 노인과 젊은 어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바라보는 방식은 달라진다.
긴 러닝타임과 CG 그리고 스토리의 부재는 이번 아바타 관객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현대 영화의 이해'와 같은 교양과목의 수강생처럼 나 역시 영화가 왜 이렇게 길어야만 하는지, 또 왜 이렇게 미적대야만 하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결국 이해라는 건 내 경험의 폭이 영화의 이야기에 가 닿느냐, 가 닿지 못하느냐에 달린 문제일 테니깐.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깨달았다. 캐머런 감독이 천문학적 돈을 들여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가족의 소중함’이라는 가장 작은 이야기임을. 그리고 그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닌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라는 것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