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학급편성은 전 학년도에서 완결되고 새 담임들은 오직 추첨으로 새 학급을 맡는다. 그렇게 아이들의 명단이 손에 들어오는 2월, 아이들과 나의 인연이 운명처럼 맺어진다.
교사들은 새 학급의 명단을 받으면 아이들 이름 옆에 참고사항이 누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부터 본다. 학습이 부진해서 신경을 더 써야 되는 아이이거나 폭력성을 띄고 감정조절이 안 되어 학교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은 전 학년에서 특별한 표시를 해서 보내신다. 이번 학교에 오니 반편성을 할 때마다 예쁜 별을 달려서 올려 보내 신다. 그중엔 왕별도 있고 중별도 있다. 어느 한 반에 몰리면 안 되니까 골고루 들어가게 하기 위해 표시해 두는 거라 그런 아이들이 없는 반은 아예 없다.
교직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는 전 담임이 달아주는 그런 꼬리표가 아이에 대한 선입견을 만든다고 생각했었다. 아이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이 순수한 상태로 만나서 하나하나 직접 알아가는 게 더 교육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안일한 태도인지 안다. 담임이 아이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학급 운영에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3월 첫날, 아이들이 앉게 되는 자리를 정하면서 번호대로 앉히되 왕별을 달고 오는 아이가 바로 내 앞에 앉도록 교묘하게 수를 썼다.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일이지만 전적으로 나의 의도였다. 덕분에 학기 초부터 아이를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고 아이와 말 한마디라도 더 주고받을 수 있었다. 작년에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로 교실에서 큰 싸움을 일으켰다고 하던데 아이는 조용했다. 그러나 승부가 걸린 게임이 있으면 과도하게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그때마다 가까이에서 아이의 마음을 읽어 주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왕별을 달고 온 M이 요즘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는 중별을 달고 온 H이다. 쉬는 시간마다 H가 M의 자리에 와서 어울리더니 급기야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몇 번 앞으로 불려 나왔다. "얘가 자꾸 나대는 게 싫어요. 인터넷에서 게임할 때 지면 뭐라고 하고, 아까 체육시간에도 졌다고 뭐라고 하고..." M이 먼저 평소의 불만을 쏟아낸다. 성격 좋은 H는 슬슬 내 눈치를 살핀다. "그래? H야, M이 너한테 원하는 걸 들었지? 그럼 너도 원하는 게 있어?" "저는 그냥 M이랑 재밌게 놀고 싶은데요." 꾸밈없는 H의 답변에 M이 뜻밖이라는 듯 얼굴이 펴진다. 내 마음도 풀렸다. "재미있게 노는 건 좋은데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되지. 지킬 수 있겠니?" 둘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어떨 땐 상황이 악화된 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담임이 업무로 바빴다거나 작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던 일이 큰 문제가 되는 일을 수없이 목격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한시도 없는 이유이다. 게다가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면을 놓쳐서도 안된다. 고학년 아이들의 경우 잘못된 일을 지적할 때보다 잘하는 일을 치켜세울 때 그 효과가 열 배는 더 크기 때문이다. 칭찬할 때는 정말 세상에 최고처럼 듬뿍, 아낌없이 해야 한다.
"H야, 너는 마음이 참 순수하구나.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해 줘서 선생님이 놀랐어."
"상대방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니, 사과도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건데 H가 참 용기가 있구나."
"M아, 너는 공부도 안 한다면서 수학 실력이 좋구나. 배운 내용을 정말 잘 이해하고 있네."
"M은 나중에 설계 같은 일을 하면 잘할 거야. 작도를 이렇게 꼼꼼하게 잘할 수가 있니. 대단한데?"
H와 M은 나에게 알람 같은 존재다. '선생님, 저희들의 말과 행동을 봐주세요. 매 순간 깨어 있으세요. ' 말해 준다. 내가 받는 월급의 팔 할은 이 아이들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들과 더불어 조금씩 나은 어른이 될 것이다. 이 아이들도 나와 함께 성장해 나가길 바라지만 그건 전적으로 아이들의 몫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