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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썸 Apr 15. 2022

그럴 수 있지,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우리 반은 매일 아침 등교하면 모닝페이지를 쓴다. 공책이 너무 크면 부담스러우니까 A5 사이즈의 작은 공책에 분량은 자유롭게 쓴다. 매일 두 줄을 겨우 쓰는 아이도 있고 매일 한 페이지가 빽빽하게 채워서 내는 아이도 있다. 단, 검사는 매일 한다. 하트나 별 도장을 꾹꾹 찍고 좋은 문장은 줄을 치고 덧붙이는 짧은 코멘트는 필수다. 모닝페이지는 바쁜 학교생활에서 아이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희미한 통로다. 


올해는 아침 루틴을 하나 더 만들었다. 아침마다 좋은 문장을 하나씩 칠판에 써 주다가 차츰 아이들한테 맡겼다. 지금은 번호대로 돌아가면서 '오늘의 문장'을 맡아 칠판에 적는다. 명언이나 책에서 읽은 좋은 문장을 출처를 밝히고 쓰면 된다. 아이들은 칠판에 적힌 '오늘의 문장'을 보다가 모닝페이지 주제로 연결하기도 하고 쓸 게 없으면 그 문장을 그대로 옮기기도 한다. 


늘 유쾌하고 조금 엉뚱한 E의 차례가 되던 날 아침, 아이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나한테 왔다. 

"선생님, 저 도저히 못 쓸 거 같아요." 

"왜? 준비 못 했니? 내가 같이 찾아봐 줄까?" 

"아니요, 애들이 제가 쓴 걸 공책에 쓴다고 생각하니까..." 

"부담스러워서 그렇구나. 애들이 다 네 문장을 공책에 적는 건 아닌데. 그럼 내가 적어줄까?" 

"아니에요, 그래도 제가 해야죠." 


보드마카로 서툴게 칠판에 글씨를 쓰는 E. 그 아이가 적은 문장은 평범한 명언이었지만 그날따라 많은 공감을 얻어 아이들 모닝페이지에 적혔다.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큰일로 다가올 수 있다. 내가 못 해낼 것 같다고 생각되었던, 이런 작은 성취를 쌓으며 아이들은 자란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누군가에겐 책 읽는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일이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선생님한테 말 한마디 거는 일이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친구에게 가는 일이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에겐 손을 드는 일이 어려울 수 있고

누군가는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마음속으로 백 번을 연습했을 수 있다.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이 교실 전체에 퍼질 때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두려움을 조금씩 떨치고 '가장 최대한의 나'로 성장한다.    






"그럴 수 있지."의 반대말을 안다. 오래전 담임이 아니고 교과를 맡아 가르쳐서 여러 반에 들어가서 수업을 할 때였다. 평소에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않던 아이였는데 그날 따라 수업 중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반 아이들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쟤는 원래 그래요."였다.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원래 그런' 아이는 세상에 없다. '원래 그렇다'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나는 절대로 너의 편이 될 수 없다'며 가혹하게 선을 긋는 행위이고, '너를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말과 같다. 지금 같아선 당장 꾸지람을 들어야 할 말을, 그 당시에 나는 씁쓸하게 넘어갔었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원래 그런' 아이는 없다. 누구도 그런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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