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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받이 Aug 15. 2021

폭죽 아가씨-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성냥팔이 소녀

“얘기 들었어요? 폭죽 파는 아가씨 있잖아. 그 아가씨를 글쎄 누가 바닺가에다가 떠밀었대.

 아랫길 방파제 근처에서 송장 둥둥 떠다니고 있는  미령 횟집  씨가 보고 신고했다잖아.”


유난히도 뼈 끝을 아리도록 추운 한 해의 첫 아침, 파도마저 얼어붙어 곧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날씨에도 해수욕장 상인들은 일찍부터 모여들어 수군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연민을 띄면서도 알 수 없는 해방감을 가진 듯 묘해 보이기까지 했다.

폭죽 아가씨라 불리던 그녀는 해수욕장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폭죽을 판매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폭죽을 판매하던 아버지가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없을 정도의 중증 알코올 중독을 앓게 되면서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 대신 폭죽을 판매하게 된 것이 13살 때부터였으니 벌써 햇수로 8년이 되었고 성년이 되어서도 아버지가 내일 마셔야 할 술을 책임지기 위해 매일을 바다에 나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폭죽을 판매해야 했다.


12월 31일 한 해가 영영 저물어가던 그날. 폭죽 아가씨는 어김없이 폭죽을 팔기 위해 해가 질 무렵 집을 나섰다. 날이 밝을 땐 폭죽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초저녁부터 그다음 날 동이 트기 전까지 폭죽을 모두 팔고 와야 했다.

“젠장할 년 오늘도 다른 데로 새기만 해라. 니 아비 손발이 떨려서 꼼짝도 못 한다고 네 년 하나 어디서 뭐하는지 모를 것 같지? 지난번처럼 폭죽 버리고 와서 걸리기만 해. 그땐 니 년부터 팔아먹을 거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폭죽을 팔기 전 아내와 작은 민박을 운영했는데 외국인 투숙객과 사랑에 빠진 아내는 어느 날 남편과 어린 딸을 두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나라로 떠나버렸다.

처음에 아버지는 파란 눈의 외국인에게 아내가 납치되었다고 생각을 했다. 아내를 수소문하며 찾아다니느라 민박을 처분하고 작은 보금자리까지 팔아야 했다.

결국 자신의 아내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스스로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그 분노를 자신의 딸에게로 퍼붓기 시작했다.


"올해 마지막 날이에요. 폭죽놀이하면서 보내세요."

폭죽 아가씨는 새파랗게 얼어버린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해돋이를 보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폭죽을 건넸다.

매섭게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에 옷매무새를 꽁꽁 싸매며 종종걸음으로 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 틈에서 폭죽 아가씨의 목소리는 파도소리에 묻혀버리는 듯했다.

백사장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그녀는 얼마 남지 않은 신호를 건너려다 그만 신발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다. 다시 돌아가기엔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자동차들이 두려워 마저 길을 건넜다.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려보자'

마음속으로 하나, 둘 , 셋 세어가며 그녀는 벗겨진 신발에 시선을 고정했다.

"폭죽 하나에 얼마예요?" 그때 꼬마 여자아이가 다가와 물었다. 반가운 마음에 폭죽을 하나 꺼내 손에 쥐어주며 삼천 원이라고 말하려는 찰나 부모로 보이는 여자가 거세게 아이의 손을 잡아채며 신경질적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무안해져 버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신발을 보려고 했을 땐 이미 시야에서 신발이 사라져 버렸다. '엄마가 참 싫어했던 털신이었는데.'

엄지발가락에 구멍이 난 두꺼운 양말을 신은 한쪽 발에는 감각이 없었지만 그녀는 잠시 털신을 신으며 투덜거리던 엄마를 회상했다.

차가운 아스팔트를 걸어 다니자 신발이 벗겨진 발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엄습했다.

'차라리 모래 위를 걷자.'

딱딱한 아스팔트의 냉기보다는 부드러운 모래가 온기를 품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백사장으로 들어가 걷기 시작했다. 푸욱 푸욱, 절뚝 걸음으로 무섭게 내리치는 파도 가까이 걸어가니 집어삼킬 것 같던 바다가 마치 잠잠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겨울에는 바깥 온도보다 바다 온도가 더 높다고.'

그녀는 문득 한쪽 발을 바닷물에 슬쩍 넣어 보았다. 아무런 감각이 없는 발에는 차가움도 따뜻함도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을 보니 곧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에 사람들은 어디선가 몸을 녹이기 위해 각자의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도 폭죽은 팔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던진 술병에 머리를 맞을 것이 뻔했다.

'그래, 12시가 되면 폭죽을 터뜨리자.'

두 발을 모래에 더욱 단단히 파묻고 그녀는 새해가 되자마자 폭죽을 터뜨렸다. 밝은 빛을 내며 터트려진 폭죽은 이내 검은색 도화지 같던 바닷물을 환히 비춰주었다.

순간 일렁이는 파도 속에는 따뜻한 전기장판에 누워 연유에 딸기를 찍어먹던 어린 시절 그녀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새빨간 딸기에 침이 고인 그녀는 손을 뻗어 딸기를 향했지만 이내 폭죽이 꺼지고 어둠만이 폭죽의 잔상을 삼키고 있었다.

'너무 추우면 환영이 보이는 걸까.'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는 홀린 듯 폭죽 하나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이내 바닷물이 밝아지면서 엄마가 자주 해주던 김치수제비를 먹고 있는 그녀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

그녀가 손을 뻗어 엄마의 허리춤에 안기려는 찰나 폭죽은 허무하게 연기를 뿜으며 꺼져버렸다. 이미 바닷물은 그녀의 허리춤까지 찰랑대며 간질거리고 있었다. 폭죽들은 이미 다 젖어 있었지만 아까 꼬마 아이 손에 들려주었던 폭죽을 거꾸로 집어넣었던 덕에 주둥이가 살아 있는 폭죽이 하나 남아 있었다. 물을 먹은 라이터가 작동이 잘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엄지 손가락에 껍질이 벗겨지도록 사력을 다해 불을 붙였다. '마지막.' 마침내 마지막 폭죽은 눈부실 정도로 환한 빛을 내뿜으며 바다를 환하게 비추어 주었다. 물속에 비친 곳은 어릴 적 부모님이 운영하던 민박집이었다.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연보라색 샌들을 신고 있는 엄마는 이내 치마를 털며 일어나 대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뒤돌아 보았다.

"같이 갈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모녀는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빛나던 바닷물은 희미한 미광을 띄며 어둠 속으로 쓸려 들어갔고 폭죽 아가씨는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1월 1일 한 해의 첫 아침, 과음을 한 탓인지 그는 일어나자마자 심한 갈증을 느꼈다.

"물 가져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폭죽을 팔러 나간 딸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이 년이 또 어디로 센 거야" 혼잣말을 하며 냉장고를 열려는 찰나 당근 모양의 자석에 붙어있는 메모를 발견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 보러 갈게요 건강하세요."




희망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어둡고, 불행한 이 축축한 이야기를 쓰면서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내내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계신 당신에게 저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오롯이 어머니에 대한 온기를 느끼려 애를 썼기 때문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폭죽 아가씨와 저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인데요.

 아, 저의 어머니는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부재를 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폭죽 아가씨가 부럽기도 합니다. 세상 어딘가에 어쨌든 어머니는 살아 계실 테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겠지요.

물론 제 이야기 속 폭죽 아가씨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다른 방식을 선택했지만요.


동네 사람들은 폭죽 아가씨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닌 당연한 듯 타인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적이 없음에도요.

이 사회의 고립된 소외계층은 당연히 비극적 결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타 죽는 모든 죽음 속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수동적 죽음들 투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또한 추위로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끝낸 것일 수도, 죽음의 끝자락에서는 행복하고 따뜻한 기억만을 가져가고 싶어 성냥을 끌어안고 돌아가신 할머니 곁으로 능동적으로 떠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행한 환경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바꿀지, 그만둘지는 적어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자살을 권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무수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수동적인 죽음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 또한 연민만이 가득한 수동적 죽음이 아닌 자신의 선택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죽음은 수동적일 수도 능동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내 의사와 반하는 현실은 더욱 싫었기에 그들의 생명권만큼은 타인이나 환경의 탓이 아닌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절대적으로 생명은 숭고하고 귀중한 것임을 다시 한번 밝히는 바입니다.


폭죽 아가씨가 아버지에게 남긴 마지막 메모는 사실 유서에 가까운데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갇힌 삶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마지막 인사말이었지만 그것이 죽음으로서 이별을 맞이하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배려일 것입니다. 엄마를 찾아 떠난 딸을 언젠가는 이해해줄 수 있을 거란 기대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녀는 정말 자신의 방식으로 어머니를 만났고 어머니와 함께 대문을 나섰습니다.


폭죽 아가씨라는 표현이 처음에는 조금 불편했습니다. 사회 통념상 '아가씨'라는 표현이 언제부턴가 조심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린 탓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13살부터 아빠를 대신해 21살이 될 때까지 폭죽을 팔러 다닌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표현이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학생도 아닌 어른도 아닌 그녀의 인생을 감히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만약 실존하는 인물이었다면 아마 그 동네에서는 폭죽 파는 아가씨, 폭죽 아가씨라 불리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다시 돌아가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별 의미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못 이겨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겨우 살아내는 그녀의 고된 삶 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어머니가 그리워지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까 고민해봤습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이 든 순간에 그녀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렸고, 그 기억들만 가지고 떠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각자의 다양한 죽음을 맞이 하기 전 가장 행복한 순간만을 짊어지고 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하늘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 저의 어머니도 삶의 마지막 순간 가장 행복했던 기억만을 안고 가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 어머니와 폭죽 아가씨 모두가 고되었던 삶에서 해방되어 그곳에서는 건강하게 그리고 근심 없이 지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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