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뒷집 할머니가 놀러 오셔서 우리 할머니와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말인거.”
“이 놈들 싹 잡아다 삶아버려야 하나?”
“그게 뭐 잡히나? 삶아도 맛도 없을 텐데.”
“이러나저러나 이 염병할 것들이 아주 다 망가뜨려놔서 약 올라 죽겠네.”
시골 마을에서는, 게다가 할머니들의 대화에서는 좀처럼 등장할 수 없는 단어들이 꽤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나왔다. 무슨 심각한 일이 벌어졌나 하고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대화의 주체가 등장했다.
“실컷 농사 져서 염병할 고라니 새끼만 배가 터지니 이거…”
그렇다. 이 심각하고도 진지한 대화의 주인공은 고라니였다.
시골 생활에 있어 ‘잡초’가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부지런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고라니는 한 마디로 척결대상이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단어를 고라니한테 쓸 것까지 있나’ 싶겠지만 고라니는 농사꾼의 시간, 노력, 땀, 돈까지 모든 것을 한 번에 앗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척결’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생각해 보시라.
월급을 받기 위해 무려 한 달 동안 늦잠의 유혹을 물리치고 지옥철을 뚫어가며 출근했다. 출근해서는 온갖 업무 스트레스에 치이며 퇴근길 맥주 한 캔으로 월급날만을 기다려온 것이다. 그런데 그 월급을 고라니가 홀랑 물고 사라졌다면? 물론 말도 안 되는 설정이지만, 그냥 그렇다고 상상해 보자. 작고 소중한 월급을 그날따라 봉투로 받아서, 꽉 쥐고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나타난 고라니가 월급봉투를 홀랑 먹어치웠다. 고라니가 먹어버렸으니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그렇다고 회사에 다시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냥 하루아침에 한 달 간의 수고가 고라니 입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제 왜 고라니를 ‘척결대상’이라고 표현했는지 감이 올까?
시골에서 작물은 곧 월급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매달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월급보다 긴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어떤 작물은 분기급(분기마다 받는 월급)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라니의 행태가 더 괘씸한 건 이놈의 고라니들은 어린 식물을 특히 좋아하고 노린다는 점이다. 얼마 자라지 않은 여린 콩 싹, 도라지 싹, 배추, 명이나물 등 나열하기도 힘들 종류의 작물이 전부 고라니가 물고 갈 맛 좋은 월급봉투 후보들이다.
그중 고라니가 특히 좋아하는 베스트 of 베스트는 상추다. 고라니가 출몰하는 지역에 아무런 방지책 없이 상추를 심는다면? 싹이 나와 제법 상추 같은 모양새를 갖춰간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다음날 아침이면 가느다란 상추 대만 남아있는 처참한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거의 100%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골에서는 태풍, 장마, 기근, 병충해 대비와 더불어 고라니 대비까지 해야 한다(지역에 따라 멧돼지 대비가 필요한 곳도 있지만 내가 자란 마을은 멧돼지가 출몰하지는 않았다).
고라니로부터 작물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비닐하우스다. 특히 상추는 비닐하우스를 자주 이용한다. 물론 이건 우리 집의 경우다. 우리는 상추 농사를 짓지만 상추를 내다 팔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우리 가족과 시골에 살지 않는 친척들이 먹을 정도만 심기 때문에 양이 많지 않다. 이렇게 적당량을 심는 작물의 경우는 하우스를 이용한다.
하우스에 심을 수 없거나, 하우스가 풀방(꽉 찼다는 의미로 쓰는 단어다.)일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노지에 심을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는 이런저런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한다. 광활한 넓이가 아니라면 많은 경우 울타리를 친다. 동화나 영화에 등장하는 예쁜 울타리가 아니다. 초록 또는 검정 망사를 밭 주변으로 빙빙 둘러싼다. 고라니가 넘어 들어올 수 없게 입구를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라니 입뺀 작전! 입뺀 당한 고라니 역시 쉽게 포기하는 녀석들이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높이로, 튼튼한 말뚝과 함께, 바닥이 들뜨지 않게 섬세하게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배고픈 고라니에게 어설픈 울타리 입뺀은 승부욕만 자극하는 비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인공 울타리를 만들 수 없는 경우에는 차선으로 선택하는 ‘작물 울타리’가 있다. 고라니가 좋아하는 작물을 중간에 심고 고라니가 싫어하는 작물을 주변으로 빙빙 둘러 심는 것이다. 시골 마을 정설에 따르면 고라니는 들깨를 싫어한다. 상추와 깻잎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쌈 채소 원 투톱인데 고라니에게 상추는 호, 깻잎은 확실한 불 호다(최근에는 들깨도 먹는다는 얘기가 있긴 하다… 후…). 그래서 고구마, 상추 등 고라니가 호시탐탐 노리는 작물 주변으로 들깨를 심어 놓는 경우가 있다.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방어책이다.
이 밖에도 고라니가 싫어한다는 용액을 병에 담아 걸어 두거나, 반짝이는 줄이나 번쩍거리는 경고등을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 새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반짝거리면 사람으로 착각하는지 다가오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확실한 방지책이 아닌 ‘고라니야 제발 먹지 말아라’라는 염원이 담긴 예방책 정도다. 튼튼한 울타리를 설치하거나 비닐하우스를 등장시키지 않는 한 언제나 고나리의 표적이 되기 쉽다. 오죽하면 고라니가 노리지 않는 작물을 골라 심기도 한다. 몇 달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느니 안전하게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심는 것이다.
농사야말로 지겹게도 예측이 안되는 일 중 하나다. 내일 추수하려던 벼가 하룻밤 태풍에 픽픽 쓰러지기도 하고, 아름아름 풍성하게 달린 고추 한 두 개에 병이 생기더니 금세 모든 고추에 병이 돌기도 한다. 농약을 잘못 줘서 죽기도 하고, 농약을 너무 안 줘서 벌레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죽기도 하고, 비가 너무 안 와서 죽기도 한다.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이런 경우 속은 상하지만 ‘뭐 어쩔 수 있나’라고 넘어가는 마음이 크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라니만은 다르다. 고라니는 나의 실수도,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도 아니다. 고라니는 고라니다.
고라니 피해는 단순 농작물에 그치지 않는다. 캄캄한 시골길에서 차 사고를 유발하는 위험한 동물이기도 하다. 고라니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기사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고는 단순히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위협이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이 골칫덩어리 고라니가 멸종 위기 동물이 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뭐라고? 고라니가 멸종 위기라고? 그렇다. 고라니는 유해 동물이자 멸종 위기 동물인 것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 동물인 동시에 사자, 하마, 치타처럼 인간이 보호하고 지켜야 할 멸종 위기 동물인 고라니. 차라리 한 쪽에 확실하게 속해 있으면 이렇게 골칫덩어리가 아닐 수 있었을까?
아빠는 얼마 전에도 뒷밭에 심은 작물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둘렀다. 마당에서 삼겹살 구울 때 함께 먹으려던 몇 포기 안되는 상추를 고라니가 홀라당 먹어 치운 후였다. 조금의 작물도 피해 보지 않게 고라니 입뺀(입장뺀지)을 실천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얼마 후에 일이었다. 아빠가 밭일을 하다 무더위를 피해 차 안에 있었는데 어미 고라니와 새끼 고라니가 차 주변으로 왔다. 아마 차 안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못 했겠지. 아빠는 고라니를 쫓기 위해 빵빵을 누르려다 말고 차 문을 살짝 열고 닫았다고 했다. 차 문의 움직임에 고라니들은 혼비백산 산속으로 뛰어 올라갔다. 옆에서 아빠 이야기를 듣다가 물었다.
"왜? 빵빵하면 되지~"
아빠는 답했다.
"아니 또 새끼도 있는데 빵-하면 놀라 자빠질까봐 그랬지."
시골살이 ‘척결 대상’ 1순위면서 쥐나 진드기처럼 ‘처리 대상’은 아니고, 농작물을 망칠 때마다 욕을 욕을 하지만 막상 마주치면 그저 못 본 척 지나가게 만드는 고라니. 고라니가 속한 애매한 교집합이 결국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