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부부 남편의 역할
머리가 히끗히끗하신 윤태기 교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시술의 전반적인 과정을 알게 되었다. 난자, 정자 채취 날짜가 정해졌고 이를 위해 과배란 주사가 처방되었다. 주사는 어디에 놓느냐, 바로 여자의 배에 놓는다. 주사의 종류도 한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주사마다 보관방법도 다르고 준비과정도 달랐다. 호르몬을 조정하는 주사다 보니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했다. 시간상 내가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주사는 내가 직접 놔주기로 하였다.
그 진료시기 즈음 공교롭게 우리는 2가지 일정이 겹쳐있었다. 하나는 결혼 1주년 기념 2박 3일 제주도 여행이었다. 주사를 처방받은 다음날 바로 제주도로 떠나 여행 중에도 계속 주사를 놔야 했다. 호텔방에 들어가 주사를 까고 용액을 쭉 빨아들여 주사기를 손가락으로 팅팅 튕기는 모습은 누군가가 본다면 묘한 오해를 살 장면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영탁 콘서트 무대였다. 사실 콘서트 무대 확정 이전 수능시험날인 11월 17일도 병원을 가야 할지도 몰라 감독을 뺄지 말지 고민이 많았다. 여자의 호르몬 주기에 따라 어찌 될지 모르니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든싱어 준비 때문에 복무를 많이 배려받은 상태라 또 빠지기가 죄송해 설마 그날이 병원날짜와 겹칠까 하며 수능 감독을 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 그 이후 콘서트 일정이 생기고 리허설 날짜가 수능일이 되면서 결국 수능 감독을 빠지게 된 것이었다.
제주도 여행 전날 오전, 둘이 병원에 내원하여 설명을 듣고 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청담동 녹음실에서 영탁형님 및 오영탁들과 '날개' 음원 녹음을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일정이 정해지면 수정할 수 없는, 하지만 여자 신체주기에 따라 변동성이 강한 난임시술 일정이 그렇게 여러 가지 다른 스케줄과 겹치다 보니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소화하며 대전과 서울을 바삐 오고 갔다.
설상가상 나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며 심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채취 일정까지 과연 이 몸상태로 시술에 임해도 될지 걱정이기도 했다. 더불어 콘서트 무대가 코앞인데, 과연 목상태는 다시 멀쩡히 돌아올지도 문제였다. 어찌 됐든 구입했던 난임 영양 보조제를 열심히 먹어가며, 금욕시기도 지키고, 열심히 와이프 배에 주사를 놓아가며 채취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난임 시술은 부부간의 깊은 합의를 통해 진행한다.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문제이다. 그저 두 당사자가 계약서에 도장 찍고 진행하는 무미건조한 일이 아닌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몸상태와 생식능력에 대한 실망감, 걱정을 안고 시작하며 시술의 100%를 직접 몸으로 받는 것은 여자이다. 그리고 시술 결과에 대한 장담은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다. 그 끝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 무한긍정적인 태도가 좋을지, 현실적이고 냉정한 태도가 좋을지는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주위에서 듣고 보는 사례들을 참고하여 이러이러하지 않을까라고 추측할 뿐이다.
차라리 병원에서 매뉴얼을 제공하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또 정 없이 매뉴얼로 성문화할 영역은 아니다. 요는 이 과정을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을 아내에게 계속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주삿바늘 하나 피부에 꽂지 않는 남자 입장에서 그 과정을 가슴깊이 통감하며 함께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의 제주도 감기가 그랬다. 나는 아픈 사람이 되었지만 이는 와이프에게 즐겁지 않은 기분을 전해주게 되었다. 건강한 정자를 생산하기 위해 시술 시작 그 직후부터 수면시간, 생활패턴을 조절하며 이 과정에 전심으로 동참하는 느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불성실의 결과가 감기라는 결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날개' 녹음날 와이프는 녹음이 끝나고 최대한 빨리 집으로 왔으면 했다. 하지만 나는 또 그 자리가 소중하여 녹음 후 회식자리에 참여하느라 늦게 귀가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그런 것이다. 사안 하나하나의 시시비비를 따질 일이 아닌 것이었다. 난임시술에 임하고 있다면 남자는 자신의 배에도 과배란 주사를 놓고 있는 것처럼 임해야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