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가 4학년이 되고, 드디어 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했다. 3학년까지는 일일 반장 시스템으로 돌아가다 처음으로 반장(이 맞는지 회장이 맞는지 늘 헷갈리지만 무튼) 선거를 한단다. 1학기에도 한차례 선거가 있었지만 말하기 민망한 표차이로 씁쓸한 고배를 마셨던 민이다. 아이는 2학기의 시작을 고대했다.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서란다. 감투 욕심인지, 인기를 얻고 싶음인지 그저 재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재도전 의지를 불사르는 아이가 내심 기특했다.
"그래, 민아. 원래 2학기 선거가 찐이다. 알지? 파이팅."
도전한다고 모두 이루는 건 아니다만 넘어져도 다시 해보겠다는 의지는 가상하다.
"엄마. 근데 말이야. 공약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잘 안 떠오른단 말이지. 뭐 좋은 거 없을까. 한 가지만 좀 힌트를 줘. 나머지는 내가 해볼게!"
" 우산. 민아, 너희 반 친구들을 위한 안심우산 어때? 깜빡하고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친구들을 위한 우산말이야. 학교 공용 우산은 개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 좋아. 음... 그걸로 할래! 엄마 고마워! 대단해!"
아이에게 엄지 세례를 받았지만, 사실 이건 내가 아닌 '교문 앞 그 아이'에게 감사할 일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한 걸음이라도 아이의 발을 아끼고자 학원 근처까지 차를 몰고 갔더랬다. 조금 늦어지는지 아직 민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그때. 눈앞에 한 아이가 핀조명을 받은 듯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주변 모든 아이들이 색색깔의 우산을 쓰고 있는 한가운데 비를 오롯이 맞고 서 있는 남자아이. 친구 우산에 장난 삼아 머리를 넣어보지만, 친구 역시 장난인지 우산을 쑤욱 뒤로 빼버린다. 아이는 헤헤 웃었지만 머리와 옷이 이미 홍수였다. 아이 주변에 저렇게 많은 아이와 어른들이 있는데 한 귀퉁이를 내어주는 우산이 없다니. 아이는 지금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이는 껄껄 웃고 있었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남는 순간 그 아이의 표정을.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두 손으로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애써 당당하려는 듯 입술 끝에 힘을 주고서. 비는 간격 없이 쏟아지고, 나무 근처에 선대도 무방비로 젖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흘긋 보면 아이는 급히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섰다. 저 아이는 지금 분명 괜찮지 않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아이가 비를 맞고 섰는 것처럼 마음이 짠해온다. 2학년? 많게 봐도 3학년쯤일 그 아이는 하늘빛의 티셔츠가 바다빛이 될 때까지 비를 맞고 있었구나.
급하게 트렁크를 뒤졌다. 이런 된장, 하필 트렁크 정리를 하며 여분의 우산을 다 집에 놔두고 와버렸다. 어쩜 단 하나의 우산도 없을까. 하필 이런 순간에 속상하다. 비짓땀이 난다. 순간 다다다 달려 민이가 차에 올라탔다. 내 황급한 손을 보더니 민이는 이유를 물어댔다. 아이를 가리키며, 우산이 필요할 것 같다 했더니 민이도 '어쩌지, 어쩌지.' 함께 난감했다. 민이의 우산이라도 있었으면 줬을 텐데, 내 아이도 차에 달려들어올 뿐이었다.
오지랖일까. 3초쯤 고민한 끝에 오지랖이어도 뭐 어쩌겠냐는 결론에 봉착. 차를 급히 돌려 민이 학교 근처 다이소로 향했다. 안 돌려받아도 될 우산을 아이에게 하나 쥐어주고 싶다. 비 맞지 말라고 당부 한 마디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쿨한 아줌마 한 번 하고 싶다. 이렇게 쏟아지는 비는 오래 맞으면 감기 걸린다고. 아줌마도 이따금 우산을 잊을 때가 있다며 괜찮다고 딱 한마디만 다독여주고 싶다. 3천 원짜리 우산을 하나 사들고 교문 앞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소요시간 4분? 정도 흘렀을까. 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있던 자리에 학원 버스 한 대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다. 그 아이가 저 버스에 몸을 실었을지 모르겠다. 우산을 전해주지 못한 아쉬움보다 안도감이 컸다. 이제 비를 맞지 않겠구나. 옷이 젖어 의자에 앉아도, 서 있어도 불편하겠지만 어찌 됐건 말이다. 이제 비는 피하겠지.
잘 알고 있다. 갑작스레 교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하교 종소리가 울리면 중앙현관까지 우산을 들고 달려와 제 아이를 하나씩 데려가는 어른들 사이에 혼자 발을 구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일하는 엄마를 둔 아이로 자라본 나는 자주 겪은 일이었다. 하굣길에 내리는 소나기가 제일 싫었다. 퍼센트까지 따지며 비예보를 해주는 요즘과 달리 비는 내리면 맞아야 하는 존재였다. 눈, 바람 다 괜찮은데 꼼짝없이 가방까지 젖어야 하는 건 난감 그 자체였다.
그럴 때면 "응! 나 괜찮아! 먼저 가." 하곤 친구들과 헤어졌다. 활짝 웃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팔을 번쩍 들어 흔들기도 하며 돌아섰다. 하굣길 방향이 달라 우산을 씌워 달랠 수도, 엄마에게 왜 데리러 오지 않았냐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으이그, 우산을 잘 넣어 다녔어야지. 내 탓이다. 누굴 탓하겠어.' 할 뿐이다. 비도 맞아봐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생각했다. ‘비를 맞으면 마음은 성장하고, 몸은 감기를 얻습니다.’
공약 덕은 아니겠지만 아이는 부반장이 되었고, 민이 반의 우산통이 탄생했다. 3천 원짜리 오지랖을 부린 뒤 탄생한 안심우산. 이름도 정했다. ‘비 맞을라, 엄브렐라’. 이름 짓고 혼자 흐뭇한 라임중독자. 가을비가 잦아진 요즘, 가을태풍이 어색하지 않은 작금의 기후에 이 우산대 몇 개가 유용하게 쓰이길 바란다. 우산이 되어준다는 말, 실은 정말 큰 힘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