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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msikY Apr 04. 2021

자허블이 뭐예요?

선배인척 하려다 혼쭐난 꼰대 이야기

“잘 먹었습니다!!”


신입 때 월급은 적었지만 그래도 아쉬움 없이 다녔던 건 선배님들의 지갑을 같이 썼기 때문이었다. 사회 생활 첫 발을 내 딛은 후배들이 뭐가 이뻤는지 선배들은 밥이고, 커피고, 술이고 무언가 같이 먹기만 하면 지갑을 먼저 열어 계산을 했고, 우리는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또박또박 하는 것으로 계산을 대신했다.

사진출처 : pinterest

일방적인 계산을 몇차례 겪은 후 우리가 깨달은 것은 '배려 메뉴'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려메뉴란, 매번 우리의 배를 채워주는 선배님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로 고가 보다는 저가에 포지셔닝된 메뉴를 선택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먹고 싶은 메뉴보다는 가장 저렴한 메뉴를 선택하고는 했다. 그렇게 선택한 메뉴는 형식적인 ‘맛있는 거 먹어’, ‘전 이게 제일 맛있습니다’가 오가고 난 후에야 주문이 끝났었다. 가격에 맞춰 주문한 메뉴는 보통 내가 원하던 메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식사를 할 때마다 이뤄지는 작은 행위들을 통해 서로 배려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가 되고는 했었다. 즐거운 식사는 계산대 앞에선 선배들의 레파토리를 들으며 끝이 났다.


 ‘너희들이 선배가 되면 후배들한테 똑같이 해야돼’


어느 덧, 내 몸에서 신입의 딱지는 떨어졌다. 마음이나 업무 역량은 아직 신입이었지만, 신입의 딱지를 단 후배들이 물 밀듯 밀려오면서 의도하지 않게 선배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들은 풋풋함이 가득했고, 대학 생활을 마치며 꽤 오랜 시간을 산 성인임에도 얼굴에는 근심보다는 희망과 열정이 가득했다. 그런 후배들의 생기에 지갑은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 덕분에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쉴새없이 후배들의 배를 채워주었고, 몇 차례의 식사 후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배려메뉴'를 선택하여 잦은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큰 무리 없이 선배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평온했던 나의 선배 생활은 새내기 후배들로 인해 변화가 생겼다.


사진출처 : pinterest

코로나로 인해 장기 재택근무가 이어지고 사람이 그리워지던 중 업무로 인해 출근을 하게 되었다. 집 밖을 나와 오랜만에 만난 아침은 상쾌했다. 아직은 차가운 아침공기 사이로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였고, 이른 아침부터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의 부지런함이 아침의 찬 공기를 데웠다. 익숙했던 그 광경들을 지나 지하철에 올라탔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이전의 출근과 달라진 것은 없없지만, 회사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고,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사무실에 도착을 해서 커피 한모금 들이키자 몇몇의 사람들이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알고 지냈던 사람들임에도 매일 화상미팅으로만 만나다 살아있는 실체를 오랜만에 보자 그 생경함에 서로를 낯설어하며 인사했다. 하지만, 곧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에 서로를 반가워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들뜬 분위기 속에 오전 근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사진출처 : pinterest

출근한 사람들은 전부 후배들이었다.  오랜만의 외식이라 다들 가격도 보지 않은 채 본인이 먹고 싶었던 메뉴를 주문했고, 그동안 미뤄왔던 얘기들을 쏟아 내느라 짧은 식사 시간은 더욱 짧게만 느껴졌다. 그 짧은 시간에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가 궁금했던 우리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커피숍으로 향했다. 누가 먼저 가자 한 것도 아니었지만, 회사 1층에 자리잡은 초록 간판의 커피숍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고, 메뉴판에 적힌 높은 가격들을 본 후에야 우리들은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아차!


'내가 살께!’


메뉴판 가격을 보며 눈치만 보고 있던 후배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나는 불쑥 선배 카드를 꺼내들고 말았다. 큰 비용을 지불해야한다는 사실을 지각하며 후회는 됐지만, 후배들의 감사합니다! 한마디에 금새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메뉴 선택 뿐. 계산대 앞에서 질문을 했다. 뜨거운거? 아니면 아이스?


'저는 자허블 아이스요'


당연히 아메리카노를 주문할거라는 생각에 HOT/ICE를 물어봤던 나는 난데없는 대답에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라고?'

'자허블이요. 자몽허니블랙티 아이스요!'


난생 처음 자허블을 듣게 된 내 귓전으로 생전 처음 듣는 다양한 메뉴들이 주문되었다. 생경한 메뉴 주문은 마지막 나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끝으로 주문이 끝났고,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나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단순히 예상 가격을 훌쩍 넘은 영수증 때문도, 띠링하며 줄어든 나의 잔고를 알리는 문자 때문도 아니었다. 비싼 메뉴를 주문했다는 건 이들에게 배려 받지 못했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호구인가?


사진출처 : pinterest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주문한 메뉴가 나와 우리는 못다한 얘기를 좀 더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대화가 끝나갈 즈음 내 옆에 있던 후배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선배님, 비싼거 시켜서 당황하셨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니라고 대답은 하였지만, 아까부터 갖고 있던 불쾌한 마음이 채 가시기 전이라 애매한 표정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문득 내 마음을 알면서 그런 행동을 한 후배가 얄밉기까지 했다. 그런 나를 눈치채기라도 한듯 후배는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맛있게 먹어야 사는 선배도 좋아할 것 같아서요. 못 마시는 커피 붙잡고 있어봐야 선배도 저희도 불편하기만 하잖아요.’


무심하게 뱉은 말인데, 그 말에 공감이 갔다. 후배의 말대로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를 시켰다면 나는 얼마간의 돈은 아낄 수 있었겠지만, 원치 않는 메뉴에 후배들은 몇 모금 홀짝 거리다 휴지통으로 던져버릴 것이고, 나 또한 그 모습을 보며 불쾌함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기분 좋은 분위기를 계속 이어갈 수 없었겠지. 그리고 함께 한 이 시간을 불편한 시간으로 기억하며 다시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예전에 세대간 차이를 다룬 레포트에서 ‘Generalist’와 ‘Specialist’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하려던 시대는 가고 전문 영역을 집중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로  바뀌면서 인간관계도 불편한 여러 모임에 참여하기 보다 원하는 모임에만 참여하며 아낌없이 투자하는 성향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바뀌는 시대의 변곡점에 서 있던 나였지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에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자허블’ 한 잔을 통해 그 변화를 깨닫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엘레베이터에 오르며, 가격을 기준으로 배려를 평가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 순간을 돌이켜 보면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한 고민 없이 '지불하는 행위'만으로 선배 노릇을 하려 했던 부족한 선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낮은 가격의 메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 선배를 위한 배려가 아닌 내 마음이 편하기 위한 ‘나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는지도 곱씹어보게 되었다. 이런 잘못 투성이 행동을 하면서, 남도 나와 같기를 바랬다니! 나도 이렇게 꼰대가 되는 것인가?


나는 앞으로도 후배들을 위해 지갑을 열 것이다. 하지만, 방식은 조금 바꿔볼 생각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지불하는 행위가 아닌 함께하는 시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어떻게 그 시간을 더 알차고 값지게 보낼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그 비용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진짜 선배가 되어 가야지!


고맙다 ‘자허블’. 진짜 선배의 의미를 알게해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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