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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Blu Nov 09. 2023

가족에게 쓰는 사적인 편지.

나의 오빠에게


안녕, 나의 오빠.


내가 기억하는 오빠의 가장 어릴 때는 언제일까 떠올려 봤어. 아무래도 우리가 키가 비슷했던 초등학교 때부터지 않을까. 그보다 더 어릴 때도 오빠와 눈 오는 날 집 앞 작은 골목에서 눈을 퍼서 화장실로 가 그 눈을 뜨거운 물에 녹이곤 했지. 당연한 그 행위가 마치 대단한 과학 실험이라도 되는 양, 우리는 퍼온 눈을 녹이는 실험을 계속했어. 돌이켜보면 그만큼 순수하던 때가 없었던 거 같아. 


우리는 자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어. 언니는 쌍꺼풀이 진한 전형적인 미인상인 엄마를 닮았지만 오빠와 나는 평범한 경상도 남자인 무쌍에 처진 아빠를 닮았었어. 어느 부모님들은 장난으로 낙동강에서 주워 왔다는 장난을 치곤 한다던데, 오빠와 내가 아빠를 지나치게 많이 닮아서 그런 장난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 난 우리가 유전자로 이어져 있다 확신했었어. 지금은 내 얼굴에 큰 불만이 없지만 예전엔 엄마를 닮은 언니를 부러워했었어. 주변에서 예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언니가 부러울 수 밖에 없었지. 오빠도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만 귀엽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 되었어.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나 싶어. 어린 나에게는 언니, 오빠가 못 듣는 다른 칭찬이 필요했던 거지. 


나는 거울을 보며 우리가 정말 닮았나 질문했어. 내가 보기엔 분명 다르게 생겼는데 주위 사람들은 우릴 쌍둥이로 오해했지. 오빠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네. 초등학교 무렵 빠른 연생이어서 3년 터울인 우리가 문구점에 가면 사람들은 내가 맏이라고 하곤 했어. 안 그래도 전교에서 제일 큰 여자애였던 나는 성장이 빨랐고 남자인 오빠는 초등학교 때 크지 않았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가 오빠보다 큰 유일한 순간이지 않았나 싶어.


우린 노는 것도 잘 맞았어. 흔한 여자애들이 좋아했던 바비 인형이나 분홍빛 도는 장난감들은 내 시선을 끌지 못했지. 오빠와 함께 산 로봇, 레고가 훨씬 재밌었어. 그렇게 해서 공간 지각력이 남보다 좋아져서 공대에 들어 갔나 싶어. 상관이 없으려나? 


5살 많은 언니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버리고 어린 오빠와 나는 파워레인저, 심슨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지. 종종 어린 시절엔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싶은 궁금증이 드는데 나는 오빠와 만화를 보며 놀았던 거 같아. 우리는 유희왕이라는 카드 게임을 좋아했지. 500원 하는 카드팩을 주기적으로 사서 모으곤 했어. 동네 문구점 옆 게임기에서 동네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곤 말이야. 우리는 사실 수집에만 재능이 있고 게임 자체를 잘하진 않았던 거 같아. 그저 화려한 카드를 모으고 또 모으기만 했지. 엄마는 종종 우리가 산 카드를 모으면 비행기 표 하나가 나올 거라고 투덜거리시곤 하셨어. 큰 상자 몇 개를 채웠으니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 우린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손에 거는 장치를 사고 싶어 했지만 그건 너무 비쌌어. 해외 직구를 해야 했는데 어린 나에게 영어가 나오는 화면은 두려움만 자극했었지. 그래도 나중에 돈을 모으면 사자고 오빠와 약속했었지. 결국 사진 않았지만 말이야. 


오빠는 어릴 때부터 장난기가 참 많았어. 나도 장난치는 걸 좋아했지만 오빠는 더 과하다는 생각했지. 2층 침대가 있던 우리 옛날 집에서 우리는 밑에 베개와 이불을 마구 깔아 놓고 뛰어내리곤 했어. 또래보다 덩치가 커서 난 내가 가진 담력을 과대평가 받고는 했어. 나는 무서운 게 참 많았는데 다들 내가 용감할 거라 판단하더라고. 어린 마음에 사람들이 나한테 실망할까 봐 강한 척을 했어. 오빠한테도 강한 척을 했지. 2층 침대에서 뛰는 거 진짜 무서웠는데 오빠를 따라 뛰어내렸어. 지금은 절대 못할 거 같아. 지금에서야 내 관절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 그때 그렇게 막무가내여서 그랬나 싶어. 


오빠는 운동을 잘 못했어. 허우적대는 동작이 보기 안쓰러울 때도 있었지. 운동을 잘 했던 아빠의 유전자는 여자인 나에게 갔어. 나는 같은 동작을 해도 오빠보다 습득력이 좋았지. 어릴 때 언니, 오빠는 태권도를 하고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져 나는 다니지 못했는데 그런 둘보다 운동을 잘하는 건 나의 자부심이 되곤 했지. 그날도 5분 거리에 오빠가 다니던 중학교에 농구를 하러 갔던 거 같아.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운동 중 오빠가 다쳤던 거 같아.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오빠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잠식돼서 무작정 오빠를 반쯤 들쳐 얻고 그 먼 길을 꾸역꾸역 걸어서 집으로 왔어. 엄마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내가 얼마나 오빠를 아꼈는지 언급하곤 해. 


오빠와 나는 엄마에게 참 별난 아이들이었을 거 같아.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던 가난한 우리 동네 기억나지. 슬레이트 지붕이 많은 곳이었는데 우리는 옥상이 있는 2층 건물의 1층에 세 들어 살았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2층에 아무도 없어서 우린 옥상에서 자주 놀았어. 안전대를 잡고 올라가지 않으면 넘어질 위험이 큰 그 곳을 우린 몇 번이나 웃으며 오르락내리락 반복했지. 5초면 올라가 하늘을 볼 수 있는 그 옥상에서 우린 참 많은 일을 했어. 비밀 작전이라며 옆집으로 몰래 들어가서 거실을 훔쳐보다 덜컥 겁이나 허겁지겁 돌아오기도 했고 눈이 와 얼어버린 옥상 웅덩이를 깨보자며 야구방망이로 내리치다 도리어 방망이를 부숴버린 적도 있지. 뻥튀기를 사면 옥상에서 옆집 강아지한테 던져 주기도 했었어. 150 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내가 올려다본 푸른 하늘을 난 아직도 잊지 못해. 엄마가 큰 바구니로 빨랫감을 널기 위해 오르던 그 옥상, 그 사이를 뛰어놀던 우리의 순수함엔 때가 타지 않았어. 


우리가 데면데면해지기 시작한 건 오빠가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인 거 같아. 분명 처음 샀을 때는 바짓단이 엄청 남던 교복이었는데 이차 성징에 들어 간 오빠는 교복을 다시 사야 할 정도로 빠르게 컸지. 나는 그런 오빠가 낯설고 어쩌면 무서웠어. 나와 같은 눈높이였는데, 난 아직 초등학생인데 오빠는 더 큰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니 괜히 대화도 안 통하는 기분이었지. 그 시절에는 언니, 오빠가 대화를 자주 했는데 나는 끼지 못했어. 난 소외감을 느꼈던 같아. 언니, 오빠가 보기엔 그저 애일 거란 생각에 난 조바심이 났었어.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그렇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거 같아. 


오빤 중학교 시절, 엄마와 자주 다퉜었던 기억이 나. 이층 침대 위에서 내려다본 오빠가 철 의자를 들고 오래된 텔레비전을 내리치며 포효하는 장면은 왜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오빠에게서 봤던 폭력적인 모습이었는데 어릴 땐 엄마랑 오빠가 싸우는 게 너무 무서웠어. 오빠는 당시에 인간관계가 매끄럽지 못해서 이상한 놈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고 들었어. 워낙 어릴 때라 정황이 바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엄마는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던 거 같아. 그 뒤로 오빠의 싸이월드나 휴대폰 문자라든지 사생활 침해를 아무렇지 않게 단행하셨으니깐. 내가 오빠였어도 엄마의 어긋난 집착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 같았어. 하지만 엄마는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문이 꾹 닫혀있는 철옹성처럼 오빠의 주변인을 마음대로 주무르셨어. 난 그걸 보고선 엄마에게 솔직하길 포기했던 거 같아. 오빠처럼 되고 싶지 않았거든. 그래서 고등학교 때 따돌림 당했을 때도 아무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며 베개에 파묻혀 울었어. 돌이켜보면 오빠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했던 게 아직도 문득 떠올라서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어. 그 어린 나이의 사랑의 탈을 쓴 엄마의 집착은 오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좁고 외로운 섬에 갇혀 나갈 수도 없는 그 곳에선 오빠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오빠는 엄마의 집착이 버거웠는지 도망치듯이 집에서 2시간 가량 걸리는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진학했어. 기숙사가 있는 곳이었지. 공부를 잘했으니깐 나는 꽤 괜찮은 도피 방식이라고 생각했어. 물론 내가 오빠와 친하지 않다고 인정한 시기도 고등학교 때부터니깐 우리 관계에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던 거 같아. 그래도 오빠의 멀어짐을 응원했어. 나는 진심으로 엄마와 오빠의 다툼이 멎길 간절히 바랐거든. 


키가 쑥 컸던 오빠는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던 거 같아. 댄스부도 하고 여자친구도 사귀면서 학교생활을 잘하는 거 같았어. 엄마가 헤어지라고 해서 얼마 못 가긴 했지만, 나는 오빠가 중학교 때보단 확실히 나아졌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한테 편한 길이었기에 궁금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사실 이 시기에 오빠와의 선은 점점 희미해져서 기억이 거의 없어. 오빠는 주말에 돌아왔지만 공부를 해야 한다며 바로 나가버렸으니깐. 나도 고등학생이 된 오빠를 귀찮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거 같아. 오빠에게 괜히 투덜거리며 장난을 쳤지만 사실은 아는 게 전무해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었어. 그 당시에 오빠의 자아는 점점 비대해졌던 거 같아. 그렇게 공부를 특출나게 하진 않았던 언니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 하곤 했으니깐. 난 오빠가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가겠다고 예상했어. 난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잘 몰랐거든.


난 오빠의 비대한 자아가 쪼그라드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봤어.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신감 없어 보이는 표정이 기억나. 나는 커가기만 했던 오빠가 작아지는 모습 적응하지 못했어. 결국 반수를 다른 지역의 대학에서 하게 됐다는 걸 들었을 때도, 문과였던 오빠가 이과로 전과한다는 것도, 군대에서 삼수를 결정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는 오빠를 선망의 대상으로 남겨 놓을 수 없었어. 그렇게 6년이란 떨어져 있던 5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어서 오빠와 친하다는 말을 농담으로도 할 수 없는 사이가 됐던 거 같아. 오빠는 나에게 서운해했지만 난 노력으로 메꿀 수 없는 시간의 공백을 여실히 느끼면서 집 안에서 고립되어 갔어. 


우리는 코로나 때 둘 다 집에 머무르면서 반강제적으로 함께 있었었지. 그때 기억나? 내가 만든 떡볶이, 치킨마요, 삼겹살구이를 맛이 없어도 끝까지 먹어주는 오빠에게 늘 감동했어. 밥을 다 먹으면 우리는 집 앞을 걸으면서 세상이 굴러가는 이야기, 주식 이야기 등 서로가 가져올 수 있는 모든 주제를 끌어와 대화를 나누곤 했지. 그 순간들이 더없이 소중해지리란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오빠와 내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건 그때가 유일했으니깐. 


나는 오빠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 오빠는 때로는 보수적이고 때로는 무심하기도 했으니깐. 그렇게 나는 오빠와 피상적인 주제만을 도마 위에 올리며 세 발자국쯤 물러나서 저 공간에 우리를 만들어놨어. 오빠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저 아이가 결코 내가 될 순 없다고 착잡함을 몇번이고 삼켜냈지. 오빠가 썼던 어느 날 그 편지가 우리 사이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여겨. 그 글 속에서 늘 봉구스밥버거에서 똑같은 메뉴를 먹는다는 자신에 대한 귀여운 설명과 내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단 오빠의 진심 어린 글에 나는 저항 없이 울음이 나왔어. 편지로 운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아. 나는 오빠가 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마음대로 재단하며 깎아내렸는데 오빠는 나를 위해 변했다는 말을 전했지. 고마웠어. 그리고 부끄러웠어. 한 번 더 다짐했어. 나의 살아 움직이는 행복들을 위해 하루를 낭비 없이 살아내겠노라. 나를 버리지 않은 그들 든든한 버팀목으로 이 풍랑을 견뎌 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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