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루코 Feb 13. 2022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기쁨에 대하여

20.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기에 평소보다 한 시간가량 더 일찍 일어나서 평소의 절반 분량의 모닝 페이지를 적고 현장으로 나섰다. 오늘의 모닝 페이지는 자기 확신을 담은 문장들로 채웠다. 나는 그 순간에 존재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내 존재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다. 나는 타인을 배려한다. 나는 솔직하고 정당하다 와 같은.


연기를 하지 않은 채 일주일 정도가 지나면 나는 '배우'라는 업을 내가 과연 지속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상태에 빠진다.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고 연기보다 잘할 수 있는 게 있는 것 같고 연기보다 잘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고. 굳이 연기여야 할 이유가 없고 맹목적으로 연기에 매달리는 게 자존심 상하는 때도 있고. 그런데 이렇게 현장에 다녀오면, 아니 하다못해 오디션이라도 보고 오면, 내 마음에 자그마한 기쁨이 번지는 게 느껴진다. 어떤 비유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목소리가 커져 있다. 실제로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다. 실제로 에너지가 돌고 있는 게 느껴진다.


현장은 언제나 분주하다. 때마다 다른 장소, 다른 인물들이 들락날락거리고 (한 작품에 고정 출연하고 있지 않으니) 매번 일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다른 사람과 계속해서 합을 맞추는 과정이 어쩔 땐 피로하면서도 어쩔 땐 굉장한 자극이라 지루할 틈이 없기도 하다. 한때는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잡아서 어떻게든 '일'을 하고 싶은 때도 있었는데, 이젠 어떤 일이든 마구잡이로 하고 싶은 시기는 지나버렸다. 아마 어떤 일이든 그저 감사해하며 해냈던 열정이 사라진 것을 두고 내가 이젠 더 이상 연기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 속단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다음 단계로 도약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는데.


오늘 한 촬영은 이미 지난번에 했어야 마땅했으나 불가피하게 미루어졌던 촬영이었다. 이미 한 차례 미루어졌던 촬영이어서 그런지, 내가 촬영하는 부분이 앞 씬이 되어 그다지 대기하지 않고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몇 줄 안 되는 대사 안에서 그래도 살아 있기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있어본 시간이었다. 내가 아주 콩알만 하게 나와도, 아주 콩알만 한 분량이어도 좋다. 그냥 이렇게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내가 살아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나는 연기가 정말로 좋다. 연기가 좋고 현장이 좋고 연기를 하는 내가 좋고 나와 연기를 하는 상대방이 좋다. 매일매일 촬영하고 싶다. 매일매일 배우였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연기해서 정말 현장이 나의 삶이 되어 그 안에 있는 나의 모습이 당연해졌으면 좋겠다. 


연기가 하고 싶지 않아 질 때, 연기에 대한 마음이 흔들릴 때, 연기를 그만두고 싶어질 때 오늘을 기억해둬야지. 오늘의 기분, 오늘의 태도, 오늘의 생각을 꺼내 봐야지. 내가 얼마나 연기를 좋아했는지 스스로 상기시켜 줘야지. 이제껏 내가 가진 어떤 무기력은 정말로 일이 없어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무기력이 찾아올 때, 다시금 우울감이 나를 덮쳐올 때 잘 알아채 줘야겠다. 어쩌면 정말로 연기가 하고 싶어서 슬퍼진 건지도 모른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잃어버린 자존감 되찾기 운동"을 시작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