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욕적이고 활동적인 엄마다. 아이에게 많은 경험과 즐거운 기억들이 어른이 되어서 힘든 일을 겪을 때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넷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은 아니, 나 혼자서 아이 셋을 데리고도 여기저기 잘 다녔다. 4살의 덩치를 가졌지만 발달지연으로 아직 아기와 다름없는 셋째와 갓난아기인 넷째를 혼자서 케어하기란 불가능했다. 죄책감이 남았다. 내가 바라왔던 이상적인 육아는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동생들을 돌보느라 아이들을 좁은 집에 가둬놓고 방임 아닌 방임을 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연 만들기 키트 재료를 신청해서 받았다. 강의도 토요일이어서 아빠가 있으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줌 수업 소리는 작았고, 옆집 인테리어 공사로 인해 너무 시끄러웠다. 거기에 더해 아직 무발화인 셋째가 돌고래 소리만 주구장창 내고 있었다.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연을 만들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초조해진 첫째는 큰 소리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화가 났다. 마음 한켠에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했는데 엄마 잘못도 아닌 걸 가지고 왜 나한테 짜증을 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짜증내지 말고 말해'라고 좋게 말하는 척 하면서 내 말투에도 한껏 짜증이 묻어나왔다. 그러곤 못난 엄마 짓을 했다. '네가 짜증 내니까 엄마도 짜증이 난다고.'
계속해서 짜증 내는 첫째에게 엄마 아빠는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진 않고 아이의 말투에만 집중을 했다. 결국 A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B라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참 못났다. 그렇게 매일 잠을 포기하며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고, 육아서를 읽고 홀로 시뮬레이션을 했던 건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이 울었다. 나는 큰 소리에 놀란 셋째가 엉엉 울고 있어 셋째를 안고 있었다. 첫째와 셋째가 우는 소리에 놀라 넷째가 깨서 울었다. 둘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괜히 아이를 위한답시고 무언가를 준비한 내 탓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무탈하게 지나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좁은 집 안에서 온 가족이 울고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며 가족들의 마음속에 커다란 씽크홀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우리 가정은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그 평화는 내가 생각하는 평화와 아이가 생각하는 평화와 같을까? 우리 아이들은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자라고 있을까? 아픈 셋째 돌보느라 힘든 부모를 보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은 마음 속에 꾹꾹 눌러담으며 자라고 있진 않을까?
아이를 위해 연 만들기 준비가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안다. 아이의 속상한 마음을 읽어주지 못했던 것. 아직 8살 첫째도 아기인데 논리정연하게 너의 기분을 말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아직 어른인 부모도 올바른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화를 내곤 하는데 말이다.
마음 읽어주기. 내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런 내일이 매일이 되면 부모도, 아이도 마음의 크기가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