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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Jan 30. 2022

한여름 가족 캠핑이 우리에게 남긴 것

맞벌이 주말부부 따위가 캠핑을 탐했더니

  바야흐로 캠핑의 전성기이다.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자유로운 여행이 어려워지자 최근 캠핑장을 찾는 이들이 부쩍 늘고 있다. 캠핑의 매력에 흠뻑 빠져 캠핑과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캠핑족이 속속 증가하고 있지만, 오매불망 캠핑을 향한 내 남편의 애틋한 사랑은 안타깝게도 수년간 짝사랑에만 머물러있다. 싱글일 때도 바쁜 일상에 캠핑을 떠날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남편은 언젠가 결혼하면 미래의 배우자나 아이들과 즐겁게 캠핑할 날을 꿈꾸며 고가의 4인용 텐트를 덥석 사둘 정도로 오랫동안 홀로 캠핑을 흠모해왔다. 캠핑 장비들을 차곡차곡 모아가는 동시에 캠핑을 향한 자신의 열망도 무럭무럭 키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짝사랑이 그러하듯, 남편과 캠핑은 좀처럼 맺어지기 힘든 사이였다.


  ‘임신은 좀 미루고 결혼부터 해서 본격적으로 연애하지 뭐.’ 딱히 연애랄 것도 없이 만나자마자 결혼 한 우리의 다짐과 달리, 나는 결혼 한 달 만에 임산부의 몸이 되었다. 오랜 노하우가 있는 캠핑족들이야 임신 중에도 출산 후에도 어린아이를 데리고도 캠핑을 즐기지만, 태생부터 집순이에다가 캠핑 경험이 전무했던 나로서는 임신 중에 혹은 어린아이를 동반한 캠핑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로 신혼 초 몇 년간 우리에게 캠핑은 아주 요원한 일이었다. 첫 번째 캠핑이 겨우 가능해진 때는 결혼 3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첫째 아이가 두 돌 때였고, 뱃속에는 임신 3주의 둘째를 임신하고 있던 때였다. 두 번째 캠핑은 그로부터 또다시 일 년 뒤, 둘째 출산 후 6개월 정도 지난 추석의 연휴 기간이었다. 한참 어린 둘째는 친정엄마가 맡아주셨고, 시댁에서 ‘이번 명절에는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기에 겨우 가능한 캠핑이었다.


  어린 두 아이를 둔 맞벌이 주말부부에게 최소 3~4일의 휴가를 요 하는 2박 3일 캠핑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맞벌이다 보니 주말에는 늘 일정이 많았다. 주중에 쌓인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아이 학원도 데려가야 하고, 접종이며 이런저런 검진도 늘 주말에 몰아서 했다. 가뭄에 콩 나듯 특별한 일정 없는 주말이 생긴다 해도, 남편은 매주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이 지난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서 일요일 오후에는 다시 직장이 있는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주말에 함께 보내는 시간은 기껏해야 하루 반나절이었다. 설령 남편이 하루 이틀 휴가를 낸다 쳐도, 내게 주어진 1년의 휴가는 단 5일뿐이었다. 자고로 워킹맘은 아이 키우며 언제 생길지 모를 응급상황을 늘 고려해야 했으니, 며칠뿐인 휴가를 여행에 홀라당 써버릴 수는 없었다. 캠핑이란 어린아이 둘 키우는 맞벌이 주말부부 따위가 감히 탐해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 같은 것이었다.




  둘째 아이가 서서히 자라자 억눌려있던 캠핑을 향한 남편의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 또한 벌써 몇 년째 우리의 손발을 묶고 마음껏 뛰어놀 아이들의 자유를 앗아간 전염병에게 이대로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렴풋하게나마, 혹은 사진으로나마 이다음에 아이들이 두고두고 추억할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우리는 이윽고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야 말았다. 남편은 삼 일간의 여름휴가 앞뒤로 이틀의 연차휴가를 붙여 일주일을 통으로 비웠고, 휴가가 적은 나 또한 큰맘 먹고 2박 3일의 캠핑 일정에 맞춰 화, 수, 목 총 삼 일간의 휴가를 냈다. 찜통 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의 어느 날, 우리는 드디어 네 식구가 되어 함께하는 첫 가족 캠핑에 도전했다. 다섯 살 첫째, 15개월인 둘째와 함께. 그래, 참 호기로웠다.


  남편은 몇 년 만에 재개하는 캠핑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났다. 짐짓 열렬히 사모하던 짝사랑 하는 님과의 데이트를 앞둔 사람처럼 들뜨고 설레어 보였다. ‘정녕 우리가 이걸 정말 다 먹고 올 수 있을까’ 싶은 식단을 내보이며 듣기만 해도 군침 도는 캠핑 요리를 구상하는가 하면, 밤낮으로 부지런히 캠핑용품 검색에도 열을 올렸다.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확실한 거리두기를 위한 윈드 스크린은 필수라는 둥,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 기존 것 보다 좀 더 두꺼운 에어매트를 사자는 둥 부지런히 나를 설득했다. 어린아이들과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오락거리를 찾아보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모든 일정을 반듯한 큐시트에 시간순으로 꼼꼼히 정리했다.


  한편 남편은 평소에 구독하던 인기 캠핑 채널의 유튜버에게 캠핑 소식을 자랑하며 해당 캠핑장에 대한 소소한 팁을 전수받기도 했다. ‘여름에 캠핑을 왜 가, 여름에 캠핑 가는 거 아니야’ 그때 유튜버는 다소 의아한 말을 남편에게 흘렸다고 했지만, 넷이 완전체로 떠나는 첫 캠핑에 한껏 고무된 우리는 당시에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자타공인 캠핑 전문가의 의미심장한 그 말을!     




  장소는 집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가까운 근교에 있는 오토캠핑장으로 선택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위치한 캠핑장을 향해 산등성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 산길을 올랐다. 둘째 임신 극초기였던 우리의 첫 번째 캠핑을 마치고 하산하던 때, 굽이진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멀미인지 입덧인지 모를 울렁거림으로 차를 세우고 구토를 했던 기억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시작부터 컨디션 난조에 휘둘릴 수는 없었다. 나는 애써 불편한 위장의 느낌과 머릿속의 기억을 떨쳐내고자 딸아이의 최애 곡인 시크릿플라워의 주제곡을 열창하며 캠핑장에 도착했다.


  ‘속세를 떠난 이상향’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캠핑장에는 극성수기 휴가철답게 사이트마다 형형색색의 텐트들이 오종종하게 모여있었다. 코로나 시대에 비교적 안전한 선택지로 각광받는 캠핑이지만, 거리두기가 무색한 광경을 마주하자 아직 마스크를 잘 끼지 않는 15개월 둘째 걱정에 긴장이 바짝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코로나둥이로 태어나 여태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다녀온 적 없고 아직 기관에도 다니지 않는 둘째는 바깥세상 구경에 아주 신이 났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어느새 쪼르르 달아나 우리 사이트에서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앞뒤 안 보고 뛰어다니다가 행여 단조 팩이나 루프에 걸려 넘어지진 않을까, 파쇄석에 찍혀 다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캠핑 장에 막 도착한 때는 자외선이 가장 강렬하다는 오후 1시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정수리 바로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렀다. 차에 가득 실린 짐을 내리고 텐트 피칭을 마친 뒤 가져온 짐을 모두 정리하려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릴 터였다. 나는 아이 둘을 맡고 남편은 그 외 모든 일을 도맡았다. 겨우 차에 실린 모든 짐을 파쇄석 위로 조르라니 줄지어 내려놓자, 강렬한 태양에 질세라 여우비가 우릴 반겨주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과 눈치 없는 불청객 여우비를 피하고자 남편은 서둘러 타프부터 쳤다. 나는 그 아래 캠핑 의자를 펼치고 한껏 들뜬 아이들을 앉혔다.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에게 얼른 휴대용 써큘레이터를 켜주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품절 대란으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써큘레이터는 시원은커녕 아이들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식혀주기에도 한참 모자랐다.


  무더위에 아이 둘을 단속하느라 캠핑장에 도착 한 지 불과 20여 분도 되지 않아 나의 에너지는 죄다 고갈되었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뽀통령과 시크릿쥬쥬가 있었다. 자연을 보여주겠다고 캠핑까지 와서 스마트폰을 쥐어 주는 마음은 무거웠지만 우선 나부터 좀 살아야 했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다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들려주고는 캠핑 의자에 잠시 기대어 앉았다. 남편은 뙤약볕 아래에서 여우비를 맞으며 텐트와의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연애를 글로 배운 이가 짝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를 성공으로 이끌어보고자 부단히 애쓰는 모양새 같았다. 남편의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살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든 것도 잠시, 뜨거운 공기를 타고 날아온 옆 텐트의 생선구이 비린내에 나는 곧 메스꺼움에 시달렸다. 현기증인지 멀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는 길에 차에서 꾹꾹 애써 누른 무언가가 다시금 위장에서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윽!



 

  초보 캠핑러의 텐트 치기는 아무래도 엉성했다. 가지 못하는 한을 평소 장비 사는 것으로 풀었으니, 초보 캠핑러의 장비만큼은 또 그 구역의 최고 수준이었다. 나는 이름도 용도도 짐작이 가지 않는 각종 장비를 세팅하는 데에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 아이들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의 인내심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남편대로 뻘뻘 땀을 흘리며 애쓰고 있었지만, ‘언제 끝나나’ 남편만 목놓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남편의 일처리 순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얼른 큰 장비의 세팅을 끝내주길 바랐다. 소소한 짐 정리는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으니까. 가까스로 텐트 피칭을 완료하고 족히 10분은 넘게 걸릴 듯한 두툼한 신상 에어매트의 바람 넣기에 열중하는 남편을 보자, 나는 참지 못하고 뾰족한 말을 내뱉었다. “그게 중요해? 그런 건 좀 나중에 해도 되지 않아?” 나 또한 힘이 들어서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고, 그 말을 들은 남편의 얼굴에는 아까부터 깊게 파인 미간 주름에 더해 입까지 툭 튀어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정리를 끝마치자 남편은 땀에 흠뻑 젖었다. 계곡에서 시원하게 아이들과 물놀이부터 하기로 했다. 남편은 물속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었고 나는 바위 위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흔들어주며 사진을 찍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너무 힘들었는데, 까르르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을 좋아하는 남편도 특유의 개헤엄을 선보이는가 하면 아이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겠다며 열중이었다. 남편도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 듯했다. 바위에 앉아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잔뜩 밀려든 짜증도 별안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물놀이 후 샤워를 마친 남편은 곧바로 저녁 차리기에 돌입했다. ‘식사란 간단하게 배를 채우는 행위’ 정도로 여기는 나와 달리 남편은 먹는 것에 매우 진심인 사람이다. 남편에게 캠핑은 곧 캠핑 요리였다. 집의 주방보다 한참 못한 캠핑장에서의 요리를 위해 남편은 그야말로 동분서주했다. 밥을 지으려 할 때 미처 쌀을 챙기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매점에 가서 햇반을 사려 할 때는 또 카드가 없었다. 지갑을 꺼내기 위해 잠긴 차 문을 열어야 했지만, 차 키가 보이지 않아 또다시 한참을 헤맸다. 남편은 저녁 한 끼를 준비하는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텐트 안과 차, 매점, 전자레인지와 개수대를 수시로 오갔다.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재료들은 출력해 온 식단표가 무색하게 아이스박스 안에 처박혀 빼먹기 일쑤였다. 한참 그릴에서 무언가를 굽다가 쌈 거리를 씻으러 간다던가, 음식을 먹다가 소스를 가지러 가는 둥 허둥지둥 이었다. 피곤하고 배는 고픈데 마음먹은 대로 일이 척척 되지 않자 이번에는 남편도 짜증이 났다. 캠핑 의자에 앉은 아이들이 넘어지거나 겁 모르는 둘째가 그릴이나 램프, 모기향에 델까 봐 잔뜩 신경이 곤두선 나를 향해 남편은 “그릇 좀 가져와!” 가만 앉아있는 나를 타박하듯 소리쳤다. 이에 대뜸 화가 난 나도 받아쳤다. “나도 지금 놀고 있는 거 아니거든! 그러게 대충 간단히 좀 먹자!” 빠지직, 캠핑에 대한 남편의 짝사랑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우리의 캠핑은 이튿날도 녹록지 않았다. 한차례 물놀이를 하고 매 끼니를 챙겨 먹는 것만 해도 벅찼다. 한 사람은 아이들의 안전을 보살피느라 잔뜩 신경이 곤두섰고, 한 사람은 먹고 홀로 정리하고 돌아서면 또 다음 끼니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이튿날 새로 온 옆 텐트의 이웃이었다. 고작 7시의 이른 저녁부터 옆 텐트의 남자는 드르렁드르렁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코를 골았다. 괴성과 신음 사이 외마디의 외침을 중간중간 섞어냈다. 다섯 살 아이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짜증을 내며 도통 잠들지 못했다.

 

  캠핑 마지막 밤, 나는 얼른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모처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총총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캠프파이어, 어릴 적 수련회의 피날레와 같은 그 순간이 나에겐 가장 큰 캠핑의 묘미였다. 무시무시한 코골이 대마왕은 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삼대가 모여 삼촌, 할머니, 장모님 하며 시끌벅적 밥을 먹었는데 코골이 대마왕의 일행은 개미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평소 남편의 요상한 코골이를 잘 아는 아내가 분명 다른 친척과 가족들 보기 민망해 일행을 다른 사이트로 내뺐으리라 생각하니 괘씸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씩씩대는 나와 달리 남편은 무념무상이었다. 그토록 꿈꾸던 모처럼 만의 캠핑이었건만, 힐링은커녕 몸과 정신의 피로만 얻었다. 남편은 옆 텐트의 요란한 코골이 소리도, 씩씩대는 나의 불평도 음소거한 채 무표정으로 스마트폰만 응시했다. 장작불 앞에 가만히 앉아 이따금 씩 한 손에 쥔 맥주만 꼴딱꼴딱 들이 삼켰다. 그 모습을 보자 ‘저럴 거면 여길 왜 왔어. 시원한 집에서 혼자 스마트폰이나 보지!’하는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애들 챙기느라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허겁지겁 먹어 치운 저녁밥이 가슴 언저리에 꽉 막혀있는 듯했다. 고요한 밤이 깊어갈수록 대마왕의 코골이 소리는 더욱 우렁차게 캠핑장에 울려 퍼졌다. 낯선 남자 때문에 깊은 밤 잠 못 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해보기는 또 난생처음이었으니, 정말 밤을 꼴딱 새웠다.  




  마지막 날은 마음이 분주했다. 이전에 퇴장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경험이 있기에 나는 조금 더 서두르고 싶었다. 식단표대로 아침을 준비하려는 남편에게 나는 대충 남은 과일과 빵, 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얼른 떠날 채비를 하자고 했다. 아침 식사 시간 내내 남편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달라는 요거트를 다 먹지 않은 딸아이에게 ‘달라고 해놓고 왜 다 안 먹어!’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남편은 분명 아이에게 짜증을 냈지만, 그건 마치 ‘왜 식단표대로 먹지 않고 라면이나 먹자는 거야!’ 나를 향한 질타 같았다. 요거트 따위 다 먹어도 안 먹어도 그만인걸, 왜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야 하고 캠핑의 막바지에 굳이 화를 내서 캠핑을 모조리 망치고 싶지 않았다. 첫날과 같이 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작은 짐을 챙기고, 남편은 큰 짐을 정리했다. 날은 여전히 무더웠고, 아이들은 여전히 설쳐댔다. 남편은 체력적으로 나는 정신적으로 심히 고달팠다.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모든 짐을 정리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뒷자리에 태우고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남편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나 역시 무더위에, 아이들에게 시달려 힘들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남편이 잠시 눈을 붙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운전만큼은 텐트 피칭과 달리 남편에게 맡기지 않아도 내가 능숙하게 맡을 수 있는 일이었다. “여름 캠핑 왜 하지 말라고 하는지 확실히 알았어. 역시 전문가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우리 이제 여름에는 절대 캠핑하지 말자!” 우스갯소리가 얼마지 않아 남편은 곯아떨어졌다. 백미러에 비친 잠든 세 부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탈했던 우리의 여름 캠핑은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싶었다.





  꿈꾸던 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한 짝사랑의 결말은 처참했다. 한여름 가족 캠핑의 후폭풍은 가히 상당했으니, 우리 집을 초토화시킨 거대한 태풍을 발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파급력은 2003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대한민국의 역대급 태풍 매미에 버금갈 정도였으니, ‘우리 가정의 역사는 이 여름 캠핑 전과 후를 기점으로 나뉜다’ 해도 좋을 법했다.


  집에 돌아온 뒤 아이들과 남편은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졌지만 나는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내가 출근하면, 큰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낼 테지만 작은 아이는 휴가인 남편이 혼자 돌봐야 했다. 고작 2박 3일의 짧은 캠핑이었는데 쌓인 빨랫감이 수북했고, 캠핑 떠나기 전에 먹은 아침 식사 그릇들은 설거지통에 고스란히 남아있었으며 장난감은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었다. 내가 집안일을 해주면 며칠간 캠핑에서 고생한 남편이 내일 조금 편히 쉴 수 있겠지 싶었다. 방과 거실을 깨끗이 치웠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새벽까지 옷감을 나눠 빨래와 건조를 두어 번 반복했고, 건조한 옷들은 모두 개어 정리했다. 주방세제가 똑 떨어져 설거지는 할 수 없어 ‘오늘 도착 보장’으로 주방세제를 주문했다.


  '빨래랑 청소는 다 해놨는데, 세제가 없어서 설거지는 못 했어. 오늘 중으로 도착할 거니까 배송 오면 설거지만 오빠가 좀 해줘!'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아침 일찍 출근길에 나섰다.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지 못했던 어린아이들과의 캠핑 후 이틀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곧바로 출근했더니 하루 종일 몹시 피곤했다. 퇴근 후 내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만큼은 평소보다 한결 여유로웠다. 주말부부라 퇴근 후면 늘 혼자 아이들을 돌보지만, 그날만큼은 남편이 있으니 든든했다. 남편은 하루를 쉬었으니 저녁 동안 아이들을 잘 돌봐주리라 기대했고, 그럼 나도 좀 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비닐째 현관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주방세제와 고스란히 방치되어있는 싱크대 안 그릇들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기대했던 퇴근 후의 장면은 대략 이랬다. ‘캠핑 갔다 와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출근해서 힘들었지? 집 깨끗이 치우고 가줘서 나는 둘째랑 즐겁게 놀았어. 오늘 저녁에는 내가 애들 볼 테니까 얼른 씻고 좀 쉬어!’라며 내 등을 토닥여 주는 것. 물론 설거지통은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했다. 내 쪽에서 쿵 하고 배려해주면, 남편도 짝 하고 배려로 화답해 주길 바랐다. 딱히 거창한 걸 바란 건 아니었다. 내가 기대한 배려는 고작 설거지, 내게 여유롭게 샤워할 짬을 주는 것, 잠들기 전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뿐이었다. 그대로인 설거지통을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것은 내가 구태여 시키지 않았어도 알아서 할 정도의 일인데, 아침에 부탁을 하고 나갔음에도 그대로라니. 짜증이 치밀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뾰로통 골이 나 있었다. 아이들을 재우는 것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고, 아이를 재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편은 저녁 내내 서재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했다.


  머피의 법칙이 이런 걸까. 일이 터지려면 꼭 이런 식이다. 하필 남편이 얄미워 죽겠는 그때, 아이들이 잠들락 말락 할 밤 중에 시부모님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서울 사는 도련님네가 늦은 밤 급 시댁행을 한다면서. “꼬공아 아공아, 할머니 안 보고 잡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희도 얼른 싸게 오라는 말이 분명했다. 다음날은 하필 오후에 큰딸이 2인 1조로 진행하는 첫 미술 수업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루 전까지 말하면 일정 조율이 가능했지만, 밤 9시가 훌쩍 넘었으니 같이 수업할 친구나 선생님께 대뜸 연락해 내일 수업을 미루자 하기에도 곤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정말 좀 쉬고 싶었다. 전화를 끊고 말도 섞기 싫은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일 날 밝으면 아공이만 데리고 시댁에 다녀와. 꼬공이는 안돼. 내일 미술학원 첫 수업인데 빼먹을 수 없어” 아까부터 이상하게 퉁퉁거리던 내게 남편은 꼬공이와 나도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쐐기를 박고는 잠이 들었다.


  자신을 향한 실망과 원망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남편은 다음 날 아침부터 조금 들떠 보였다. 솔직히 나는 나와 큰딸이 함께 가지 않으면 남편도 시댁에 가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다. 어린 아공이는 차를 탈 때 꽤 보채는 편이니까 혼자 운전하면서 돌보기엔 쉽지 않을 터였다. 부리나케 식사를 마친 남편은 다시 한번 나에게 함께 가겠느냐 물었고, 나는 거절했다. 어제부터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내게 남편은 급기야 ‘대체 왜 그래’라며 짜증을 냈다. 그제야 나는 캠핑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남편에게 서운했던 모든 것을 속사포로 모조리 토해냈다. 뜻밖에 내 서운함을 전해 들은 남편은 새삼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게 왜 안 자고 그 새벽에 집안일을 해 가지고는... 놔두면 내가 다 했을 텐데”




  맞는 말이었다. 빨랫감이야 쌓여있든 말든, 집이야 널브러져 있든 말든 피곤하면 잠이나 잘 것이지, 나는 왜 누가 시키지도 않은 우렁각시가 되기를 자처했을까. 내 사랑의 언어가 배려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입장에서야 조금 억울할 만도 했다. 나는 그 어떤 말이나 선물보다 나를 위한 작은 배려나 헌신에 유난히 감격하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묵묵히 청소기 먼지 통을 비워주거나 쌓인 재활용품을 말끔히 치워주는 일, 설거지를 마치고 배수구 안에 담긴 음식물을 깨끗이 비워내는 등 귀찮고 번거롭고 하기 싫은 일들을 나를 위해 상대가 기꺼이 해줄 때, 그때 나는 비로소 피부에 와닿는 사랑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날 내가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며 집안일을 한 것은, 나만의 언어로 남편에게 내 사랑을 표현한 셈이었다. 내가 전한 사랑을 상대가 알아듣지 못했고, 상대로부터 내가 기대한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을 때 나는 실패한 짝사랑으로 시름시름 앓게 된 것이었고, 이윽고는 표효하는 사자가 되었던 것이다. 남편은 시댁에 가지 않았고, 내심 미안했는지 그날 내내 푹 쉬라며 부담스럽게 나를 밀어내고 아이들과 열심히 놀아주었다. 우리 집을 향하던 거대한 핵폭탄급 태풍이 살짝 방향을 틀어 비껴가는가 싶었다.



혈육 사이의 문제 앞에선 유독 다른 상태가 되곤 한다. 더 섭섭하고 더 속상하고 더 상처받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다가 엉뚱한 방식으로 폭발해버린다.

p.154 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이후 한참이 지나 책을 읽다 위 구절을 발견하고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내가 딱 그랬다. 설거지가 뭐길래 그렇게 서운했을까. 결코 설거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 좋은 마음에서 의기투합하여 떠난 캠핑이었는데 여러모로 힘든 상황 속에 우리는 정말 작고 사소한 것에 서로에게 실망하고 마음이 상했다. 캠핑장에서 상대에게 서운하고 마음이 상한 그 순간, 우리는 솔직하고 덤덤하게 상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참는다 생각했지만 훌훌 털어내지 못했고 그 불편한 감정을 꾹꾹 눌러 마음에 담았다. 캠핑장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실어 온 짐들과 같이 그 상한 마음을 기어코 집까지 끌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렇게 꾹 참고 참고 참다 결국 엉뚱한 데서 펑하고 터진 것이었다.


  이후 우리 집에서 한동안 ‘캠핑’은 금기어가 되었다. 침대 위 천장에 붙인 야광별 스티커를 보며 큰아이는 말했다. “엄마! 우리 캠핑 갔을 때 별 많이 봤잖아. 우리 또 캠핑 갈까?” 남편은 슬쩍 큰아이의 눈을 가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제 캠핑은 진짜 안 가냐고? 그럴 리가. 꽃 피는 봄이 오면 우린 벚꽃 맛집을 찾아 다시 한번 떠날 예정이다. 코끝을 간질이는 살랑이는 봄바람이 불어올 때의 우리는 숨 막히는 더위에 압도당한 그날의 우리보다 조금은 더 자라 있을 테니까. 한 여름 가족 캠핑이 당시 우리에게 남긴 것은 상처였지만, 그 상처는 서서히 아물며 우리에게 단단한 굳은살을 남겼다. 봄이 어서 오면 좋겠다.





이 정도가 집안을 초토화시킬 핵폭탄급의 태풍은 물론 아니지요. 태풍은 우릴 비껴갔을까요?

그날 남편은 시댁에 가지 않았어요,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편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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