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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엄공 Nov 20. 2022

회색 손 사내여, 울지 마오

그 손, 내가 잡아 줄게.

  우리 집에는 회색 손 사내가 살았다. 잠이 많은 사내는 매일 밤 잠들기 전 머리맡에 크림색 타원형 자명종을 놓아두었다. 물론 잠결에 반짝이는 은색 자명종 버튼을 눌러 끄는 것쯤이야 아주 손쉬운 일이었으나, 다행히도 그에게는 늘 그보다 일찍 깨어 곁에서 부업을 하는 아내가 있었다. 사내가 유독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힘겨워하는 날이면, 아내는 꺼진 자명종을 대신해 사내를 깨웠다. "미쟈빠, 미쟈빠(미진이아빠)."

   

  한창 밥보다 잠이 고팠던 젊은 시절의 사내는 빈 속에 겨우 냉수 한 컵을 들이켜고는 부리나케 체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매일 꼭두새벽 홀로 집을 나선 사내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가끔 공사 마감이 시급하면 밤을 꼴딱 새워 하루 반나절을 일하고(이런 날은 두 대가리를 쳐준다고 했다.)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예외적인 몇 날을 제외하면 그의 생활은 평생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됐다. 눈 뜨면 나가고, 해 떨어지면 돌아오고, 집에 와서는 늘 조금 모자란듯한 잠을 잤다. 다음날이면 또다시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돌아왔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사내는 오뚝이 같기도 했고, 부메랑 같기도 했다. 잠시 누웠다가 금방 몸을 일으켜야 했고, 매일 집을 나서지만 때가 되면 늘 제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간밤에 물탱크가 꽁꽁 얼어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추운 겨울날이면 사내는 꼭 모자를 쓰고 다녔다. 안창에는 복슬복슬 털이 있고 양쪽에는 강아지 귀처럼 늘어진 귀덮개가 달린 코르덴 모자. 그런 날이면 집으로 들어서는 그의 두툼한 점퍼 안에는 누런 종이봉투 안에 가득 든 군고구마가 한아름 안겨있었다. 온종일 추위에 달달 떨었을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외롭지 않도록 품 속에서 훈김을 전해 준 군고구마를 건네받으면 세 남매는 옹기종기 안방에 모여 앉아 한 이불을 덮고 앉아 군고구마를 나누어먹었다. 어느새 차갑게 식었어도 갓 구운 노오란 속살은 달고도 달았다.


  또 아이들이 반쯤 지난여름 방학조차 시시하고 지겹게 느껴질 무렵, 무더위가 아주 절정에 다다른 한여름철이면 사내는 벌겋게 익은 얼굴을 하고 퀭한 눈으로 기진맥진한 채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런 날이면 사내를 보던 엄마의 눈빛에는 왠지 모를 애잔함 같은 것이 서려 있었고, 저녁상에는 몸보신에 좋다는 별미가 사내에게만 차려지기도 하였다. 어느 날 저녁상에 마주 앉아 눈두덩이가 왜 그렇게 부풀어 올랐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땀을 너무 많이 닦아서’라며 알려주었다.


  귀가 후 사내는 곧장 욕실로 가 몸을 깨끗이 씻고 그의 옷을 직접 빨아 널었다. 현관부터 욕실까지 그가 지난 자취와 욕실 문 앞에는 왕왕 회색 가루가 떨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시멘트 가루’라는 것은 한참 자란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의 정확한 직업은 미장이이며, 미장이는 시멘트를 바르는 작업자라는 것과 그래서 시멘트가 마를 새가 없던 그의 손은 씻은 후에도 늘 회색 시멘트가 배어있었다는 것도.





  사내가 알딸딸 기분 좋게 취해 돌아오는 날도 가끔 있었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어 딱히 이렇다 할 애정 표현이나 감정 교류가 없어 그저 무뚝뚝한 줄 알았던 그가 그런 날이면 좀 재미있어졌다. 배배 꼬인 발음으로 연신 말했다. "우리 딸! 사랑해. 딸꾹. 우리 아들! 딸꾹! 우리 마누라! 사랑해. 딸꾹딸꾹딸꾹..." 술 냄새가 폴폴 나는 뽀뽀 세례도 이어졌다. 뾰족뾰족한 사내의 수염이 입가에 닿으면 따갑다며 싫은 체했지만, 까슬까슬 간지러운 그 느낌이 사실 정말로 싫지는 않았다. 주로 그런 날은 잠바 안주머니에서 두둑한 흰 봉투가 나오는 날이었다. 봉투를 건네받은 엄마는 현장은 바뀌는데 봉투 겉에 쓰인 사내 이름의 석자를 적은 글씨체는 어째서 이토록 한결같은가 의아하다며 눈을 흘겼지만 사내는 늘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런 날은 틀림없이 내게도 뒤로 짭짤한 수입이 생기는 날이었다.


  사내는 건장했다. 키나 체격이 특출 나지는 않았지만, 노가다로 다져진 몸은 군살 없이 다부졌고, 양팔에는 볼록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물리적 힘이 필요한 모든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고, 그는 그의 몫의 모든 일을 거뜬히 해내었다. 또 사내는 용감했다. 가끔 한밤 중, 어쩌면 앙큼한 도둑고양이가 무엇을 쏟아낸다거나 혹은 휘몰아친 바람에 날아온 나뭇가지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일지도 모를 작은 기척에도 그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당당히 랜턴을 들고나가 바깥 동태를 살폈다. 어디 그뿐인가. 그 무서운 ‘전설의 고향’조차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볼 정도의 담력이라면 나는 그가 과연 이 세상 어느 무엇도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가끔 한밤중 목이 마르거나 소변이 마려워 홀로 잠에서 깬 때에도 안방에서 그의 드르렁대는 코골이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것으로 온전히 안전하다고 느꼈다. 자고 있을지라도 한 지붕 아래 그가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사내는 평소 화를 잘 내지 않지만, 한번 화가 나면 아주 무서운 존재로 통했다. 쌍꺼풀이 없이도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아랫입술을 깨물면, 그 자체로 위엄이 섰다.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평소 집안에 소소한 모든 것은 엄마가 결정했지만 이면에는 분명 사내의 암묵적인 위임이 있었다. 정말 큰 일은 사내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회색 손 사내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그는 우리 모두가 의지하고 따르는 영웅이었다. 더위나 추위, 굶주림과 헐벗음은 물론 그 밖에 닥칠법한 모든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했다. 가족에게, 아니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는 영웅적인 존재였다. 특별한 회색 손을 가진 나만의 영웅. 나는 훗날 영웅이 힘을 완전히 잃는 것은 전혀 예견치 못했다. 어느새 훌쩍 자란 자식들과 눈높이를 같이 해도, 더 이상 한 가닥씩 뽑아 줄 수 없을 정도로 온 머리가 희게 세어도 그는 언제나 건재하리라 믿었다. 자고로 위대한 영웅 서사에 몰락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 역시 영원히 견고할 줄로만 알았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집을 나선 그가 해가 툭 떨어진 저녁이 되어서도 집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그날, 그 사고 전까지는.     



     

  2016년 여름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폭염으로 사망한 노인들에 관한 뉴스가 연일 심심찮게 들려왔다. 수일째 지속된 기록적인 폭염은 한반도를 불지옥 마냥 뜨겁게 달구었고, 그 사나운 열기는 캄캄한 밤에도 식을 줄 몰랐다. 8월의 어느 날, 밤새 열대야로 뒤척인 나는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딸깍.     


  밤새 터덜터덜 무용하게 돌아가던 선풍기를 엄지발가락으로 꾹 눌러 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기상 알람도 울리지 않았으니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더워서 더는 잘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열고 나오자 후텁지근하고도 고소한 공기가 코로 훅 들어왔다. 이 더위에 함께 살던 첫 손녀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미역국을 한솥 끓여두었다. 잔치에 빠질 수 없는 잡채도 하고, 전도 부쳤다. 조카가 태어난 이후로 우리 집의 가장 큰 기념일은 조카의 생일날이었으니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낮 동안 각자의 하루가 얼마나 고되었든, 저녁이면 다 함께 둘러앉아 꼬마 아가씨의 두 번째 생일을 기뻐하며 다 함께 축하 파티를 열 것이었다. 나는 식탁 위 차린 음식을 휘 한번 둘러보고는 엄마에게 물었다.     


"아빠는?"

“일하러”     


  새삼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둥 엄마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내게 퇴근길에 케이크를 사 오라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아빠가 일하러 가신 것은 당연한데, 그날따라 난 그 사실이 참 생경했다. 더워서 가만히 누워 숨만 쉬어도 괴로운 이런 날에도 아빠는 여전히 공사장으로 일을 하러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속상하고도 화가 났다. ‘예순이 훌쩍 넘었고 이제 자식들도 다 컸는데, 좀 요령껏 쉬엄쉬엄 걸러 가도 되지 않나.’ 걱정 반, 불만 반 턱 끝까지 올라온 볼멘소리를 애써 꿀꺽 삼키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예순을 훌쩍 넘긴 사내에게는 아직도 노가다 판에 나갈 수밖에 없는 수가지 이유가 있었다. 다가오는 겨울로 예정된 작은 딸의 결혼,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아들의 뒷바라지, 주택담보대출과 불안한 노후... 정년도 없이 평생 공사판을 맴도는 사내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아리지만, 나는 겨우 내 앞가림을 스스로 하는 것 외에 그의 등 뒤에 산처럼 지어진 묵직한 모든 짐을 대신 지어줄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어찌 그에게 ‘이제 고생 그만하시고 쉬엄쉬엄하세요’라는 무책임한 말 따위를 하겠는가.




  유명한 조카 바보인 나였지만, 더없이 기쁜 조카의 생일인 그날 나는 어쩐지 출근 후에도 오전 내내 기운이 없었다. 최고기온이 35도를 웃돌고 폭염경보가 내려졌으니 날씨 탓이라 여겼다. 점심에는 회사로부터 겨우 300미터 남짓 떨어진 식당에서 돌아오는 그 짧은 걸음에도 현기증이 일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쾌적한 에어컨 바람이 온 피부의 열감을 순식간에 날려주자 문득 사내 생각이 났다. 언젠가부터 밖에서 나 혼자 좋은 것, 안락하고 근사한 것을 누릴 기회가 찾아오면 나는 늘 그 순간 어느 공사판에서 애쓰며 땀 흘리고 있을 사내를 떠올리는 습관이 생겼다. 누구도 나에게 그가 얼마나 고된 일을 감내하는지에 대하여 세세하게 일러준 적은 없었지만, 우리 동네에 재개발 붐이 일던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오가며 안전모를 쓴 채 아슬아슬하게 높은 건물에 매달려 일하는 인부들을 자주 보게 된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 우리 아빠도 집에서 나가면 저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오시는 거구나...’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 건축과에 재학 중인 한 동아리 선배로부터 관리직들은 거친 노가다 인부들을 부리기 위해 나이가 곱절이나 많은 그들의 성씨를 부르며 반말로 작업 지시를 내린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긴긴 여름 해가 어찌나 야속한지, 나는 어서 해가 떨어지길 바랐다. 해가 지면 나는 퇴근길에 사랑하는 조카의 생일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고, 우리 가족은 한데 모여 초를 켜고 노래하며 기쁜 저녁상에 둘러앉겠지. 그럼 누군가는 ‘와 오늘 진짜 덥더라’라는 말을 내뱉고 다른 이들은 끄덕끄덕 맞장구를 칠 수도 있겠지. 뽀로로 초콜릿 케이크가 좋을지, 아무래도 더우니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나을지 시시콜콜한 고민을 하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엄마”

  “엄공아. 누가 아빠 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병원이라고 해서 지금 가고 있어.”

  “응? 무슨 말이야? 아빠 폰 잃어버렸어? 그 폰을 주운 사람이 병원에 있다고?”

  “아니 그건 아닌 거 같고... 부산대 병원이라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무슨 말이야. 아빠가 오늘 일하러 간 곳이 병원인데 폰을 잃어버렸다고?”

  “그게 아니라 폰 주인이 병원에 왔는데.... 지금 통화는 못한다고... 급히 와보라는데..”

  “아이참, 무슨 말이야. 급성 위염? 아님 장염이나 맹장 같은 건가...?

   오라면 가봐야지. 어느 부산대 병원. 양산?”

  “응 양산으로 가고 있어. 아차, 근데 그게 헷갈리네. 다시 전화해보고 전화할게.”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사내의 응급실행은 기껏해야 복통 정도였으므로 전화를 끊고도 나는 사실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재간이 뛰어난 엄마가 어째서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전달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이토록 당황하고 있는가만 의아할 뿐이었다. 몇 분 뒤 다시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양산이 아니라 아미동이래. 택시 돌려서 가고 있다.”

  “응. 그럼 가서 전화 줘. 나 퇴근까지 아직 몇 시간 남았으니까 마치면 거기로 갈게”

  “응. 근데 아빠가 의식이 없대... 일 하다 떨어져서 많이 다쳤다는데...”

  “뭐????????????????? 나도 곧바로 갈게. 가서 만나”    

      

 통화를 마친 후 나는 그곳까지 가는 약 한 시간 가량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어느 경로로 병원까지 다다랐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딱 하나, 가는 내내 운전대를 부여잡고 애처럼 엉엉 울며 소리 내어 신께 애원했다.


  “하나님, 안 돼요. 우리 아빠 평생 고생만 한 거 잘 아시잖아요.. 근데 하필 그 공사판에서 데려가시면 어떡해요. 안 돼요. 싫어요. 절대 안 돼요...!”




  사고는 여느 보통날과 다를 것 없던 하루의 어느 순간 급작스레 사내를 덮쳤다. 오후 참으로 국수를 한 그릇 뚝딱 먹고, 잠시 잠깐 휴식의 명분이 되어주는 담배를 몇 가치 태운 뒤 5층에서 하던 작업을 마저 이어가기 위해 벽돌을 가득 실은 수레를 크레인(이라기보다는 도르래에 달린 발판에 불과한)에서 5층으로 끌어올리던 찰나의 순간. 사내가 노가다꾼으로 지낸 세월이 40년이었다. 공사판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 특별히 경계할 어떠한 사고의 징조는 전혀 없었다. 후에 사내에게 전해 들은 사고 정황에 따르면 그저 그날은 극심히 더웠고, 당시 수레에는 평소보다 조금 많은 양의 벽돌이 실려 와 건물로 당겨 올리기가 버거웠다고. 그래서 끌어당겨야 할 수레에 그만 딸려갔고 ‘어! 어!’ 하는 순간 수레와 함께 추락하게 된 것이었다. 또 수레 가득 실린 벽돌들은 1층으로 내동댕이쳐진 사내 위를 와락 덮쳤다. 이후 사내는 곧바로 응급차에 실려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도중에 응급차 안에서 심정지가 왔고 CPR을 수 분 간 실시한 뒤 겨우 호흡을 되찾았다.

   

  신은 생떼에 가까운 내 절박한 기도를 들어주셨다. 정신없이 달려 가까스로 대학병원 응급외상센터에 다다랐을 때, 다행히 사내가 아주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몸은 처참하게 으스러졌지만 의식도 회복하였다. 잠깐의 면회를 허락받은 나는 사내에게 뛰쳐 들어가 산소호흡기와 온몸에 이런저런 줄을 잔뜩 달고 피와 멍투성이가 된 채 낯선 모습으로 누워 있는 사내의 손과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 알아보지? 여기 지금 병원이야. 아빠 일하다 떨어졌는데 이제 괜찮아…” 이내 사내의 눈가에는 평생 본 적 없던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또르르 사내의 뺨을 타고 내렸고, 사내는 끔뻑 눈짓으로 답을 대신했다.


  의사는 사내가 이 정도인 것은 기적이라 하였다. 5층이라지만 실상은 해당 건물의 층고가 높아 보통 건물로 치면 약 8층에서 떨어진 셈이었다. 즉사했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경우였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은 건지더라도 뇌와 사지에 심각한 외상 후유증을 남길 정도의 사고라 하였다. 허나 사내는 목숨을 건졌고 다리뼈는 산산조각이 나고 갈비뼈는 부러지며 폐를 찔렀지만, 뇌와 신경만큼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높은 건물이 형태 하나 남김없이 와르르 무너졌는데 그 안에 깔아 둔 전선은 온전한 셈이라 하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이상 없이 불이 켜지는. 그날 이후 사내는 약 2년 남짓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을 오가며 반복되는 수술과 치료를 거쳐 아주 서서히 건강을 되찾았다. 트라우마로 한동안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두려워하긴 하였지만, 계단을 오르거나 양반다리를 할 수 없는 것 이외에는 모든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사고를 겪은 후의 회색 손 사내는 더 이상 회색 손이 아니었다. 그 큰 사고를 당한 이가 어쩜 이토록 멀쩡한가 문득 경이로울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전처럼 극한 노동강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산재로 몇 년간 자부담 없이 입원과 통원 치료를 이어갔고 그동안에는 산재 급여를 수령했다. 온전한 일당보다는 적었지만 그래도 주어지는 급여가 있으니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자 산재에서는 치료 종결을 종용했고 죽음의 문턱에 다녀온 것에 대한 보상 혹은 위로조로 일정의 보험금을 일시 지급했다. 수천만 원이 통장에 한 번에 찍혔다. 아마도 사내가 단번에 만져본 가장 큰돈이었으리라. 적지 않은 액수였지만 노동력을 상실한 사내가 앞으로 자신과 아내의 생활을 이어가며, 노후를 챙기고, 먼 곳으로 훨훨 날아가길 꿈꾸는 예술가 아들을 뒷바라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마침 돈은 남아있는 주택담보대출 잔액과도 꼭 들어맞았는데, 수천만 원의 돈은 그간 사내의 손에 쥐어진 모든 돈이 그랬던 것과 달리, 단 한 푼의 돈도 아내에게 스윙 없이 그대로 새마을금고에 꽂혔다.


  이후로 사내의 수입은 사는 집 2층의 작은방 두 칸에서 발생하는 약 30만 원의 월세 수익과 몇십만 원의 국민연금이 전부가 되었다. 그나마 대출이자는 없지만, 그 돈으로는 제 아무리 소박하게 살아도 숨만 쉬어도 나가는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했다. 적자 생활을 지속하자 몇 년간 받은 산재 급여로 모아둔 돈도 어느새 바닥이 났다. 평생 씩씩하고 묵묵히 남편을 내조했던 아내조차 밖에 나가 이제는 육체노동을 감내할 만큼 성한 몸이 못되었다. 사고 네 달 뒤 결혼을 하고 한 달 뒤 임신을 한 나는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두고 주말부부를 청산하겠다던 당초의 계획을 접었다.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내가 일을 지속하면 적은 액수라도 고정으로 보태줄 수 있으니까.




  사내가 평생 등에 짊어지고 있던 크고 무거운 짐덩이, 그중 일부를 나라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작은 힘이라도 있으니 참 다행이었지만 실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구구절절한 워킹맘의 애환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주말부부로 맞벌이를 지속한다는 것은 정말로 수시로 높다란 난관 앞에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그랬다. 둘이 버는 수입은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 된 영문인지 삶은 참 팍팍했다. 설령 부부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모든 싸움의 궁극적 원인은 ‘주말부부’ 혹은 ‘맞벌이’로 귀결됐다.


  그럴 때면 남편은 나에게 비아냥 섞인 말로 일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거나 때로는 일을 관두고 합가 하면 어떻겠냐는 진심 어린 호소를 하기도 했다. 남들은 내가 돈 욕심에 혹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핏덩이를 맡겨두고 일하는지 알았지만, 남편은 내 속내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맞벌이 회의론, 주말부부 청산론을 제기하면 나는 늘 약자가 되었다. 그가 내 남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나누어지게 된 짐에 대하여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늘 공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엄마와의 대화에서 남편에게 얼마간 가졌던 부채 의식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는 힌트를 발견했다.




   코로나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세대원 수에 따라 가구당 세대주에게 지급하였던 정책 덕분(?)이었다. 아빠는 당신 계좌로 들어온 돈을 풀지 않고 자신의 계좌에 고스란히 두었고, 나는 연이어 며칠이나 그에 반발한 엄마의 불평을 들어주어야 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까운 곳에 사는 딸에게 하는 하소연 정도로 생각해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들었다. 그런데 계속 반복해 듣다 보니 경제적 문제로 인한 엄마 아빠 사이 감정의 골이 꽤 깊다는 것을 알았고, 한 사람의 편에 서서 싸움을 부추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써봤자 아빠가 뭐 혼자 다 쓰겠어? 그냥 통장에 남겨 두는 거야. 아빠가 돈 써봤자 몰래 숨어 피우는 담배 좀 사고, 로또 한 장 사고, 손녀들 과자나 사주잖아.”

  “아이고 참, 너는 그래도 네 아빠라고 편도 잘 든다. 나는 매달 나갈 돈만 생각하면 머리가 땅 아픈데, 평생 일일이 돈 타 쓴 적 없이 알아서 했는데. 이리 살려니 정말 스트레스다.”

  “엄마. 아빠가 돈 벌 때도 그랬어? 안 그랬잖아. 뭐 가끔 얼마씩 용돈을 떼긴 했어도 아빠가 벌 능력이 있을 때는 월급 딱 주고 경제권은 전적으로 엄마한테 맡겼잖아. 근데 이제는 아빠가 벌 수 없잖아. 그러니까 아빠도 앞날이 걱정되어서 그러지.”   

 

격양된 어투로 아빠를 향한 날 선 비난을 쏟아내던 엄마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언제는 우리가 뭐 넉넉해서 살았니. 결혼할 때 네 아빠 가진 돈 한 푼 없었어. 작은 단칸방 월세 전전하며 살았는데 암만 고생해서 돈은 벌면 뭐하니. 사람 좋아해서 버는 대로 족족 써버려서 모은 돈도 없더라. 월급 받았다고 술 마시고, 술 진탕 마시면 술병 나서 며칠 일 못하고. 너 태어나기 전에 네 아빠 사람 만든다고 내가 빙초산 먹고 죽는다고 덤볐어. 그러고는 좀 낫더라. 너 가져서부터는 건설 경기도 좋아져서 일도 끊이지 않고 임금도 좀 오르고 해서 그때부터 확 변한 거지... 그래서 그 이후로 전셋집도 구하고, 집도 사고, 어느새 자식들도 이렇게 잘 키웠잖아. 너희 어릴 때 한날은 술 한잔 이빠이하고 울먹이며 집에 왔더라. 자기 너무 힘든데, 이 힘든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대. 자기가 나중에 늙고 병들어 일할 수 없으면..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거야. 애들이랑 가족은.”

  “... 그래서 뭐랬어?”

  “뭐라 긴. 이 악물고 사는 데까지 악착같이 일단 한번 살아 보자 했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사내의 눈물이라니, 이건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사내는 다음 날 곧바로 잊었을지 모르는 취중 대화를 엄마는 수 십 년이 지난 후에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취기를 빌어야만 겨우 슬그머니 드러내어 볼 수 있는 내 남자의 연약한 마음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왜 집에서 항상 가장 늦게 자고, 가장 일찍 일어났는지. 세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어째서 집에서 잠시라도 손을 놀린 적이 없었는지. 지금은 잘 드시는 아이들 간식거리를 우리 키울 때는 왜 손도 대지 않았는지. 어째서 자기 몫의 속옷 한 벌 선뜻 살 수 없었는지. 엄마는 누구보다 사내를 사랑했고, 사내의 연약함을 알았으며, 그 사내를 가련히 여겼다.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내를 돕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날 사내를 향한 원망으로 시작된 대화에서 엄마의 깊고 오랜 사랑을 느꼈다. 천하무적인 줄 알았던 어릴 적 나의 영웅이 사실은 아주 나약한 몸과 멘털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끔은 남몰래 울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곧 내 남편이 떠올랐다. 오늘도 가장의 짐을 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나의 또 다른 회색 손 사내에게 지워진 가장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우며, 그에게는 버틸만한 힘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내 남편도 차오르는 울부짖음을 누군가에게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을까. 만약 그가 어느 날 사내와 같이 눈물짓고 힘에 겨워 비틀된다면 그때에 나는 과연 무슨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잠자는 남편의 모습을 곧잘 지켜본다. 남편은 일이 풀리지 않거나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이 생길 때면 꼭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가끔 잠결에 비명을 지르거나 팔을 휘휘 허우적댈 때면 나는 그를 살포시 토닥여준다. “괜찮아. 꿈이야.”미간에 잡힌 주름은 꾹꾹 눌러 펴주고, 훤히 드러난 넓적한 배는 조용히 덮어준다. 곤히 잘 자면 요즘 ‘괜찮구나’ 안심하고, 나쁜 꿈을 꾼 다음 날에는 넌지시 묻는다. “요즘 일은 어때?”     




  이제 나에게는 일터로 나아가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사회가 총성 없는 전쟁터라면, 나는 나의 회색 손 사내를 전쟁터에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무기가 없고 나의 힘이 다하면, 기꺼이 치맛자락에 돌멩이라도 가득 담아 나는 내 사내의 곁을 지키고 그의 사기를 높일 테다. 행여 싸움에서 다치거나 일보 후퇴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모든 패배는 그가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마땅하다.


  이 것은 나의 오랜 영웅을 기리는 나만의 방식이다. 수십 년 전 내가 미처 닦아주지 못한 사내의 눈물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나의 회색 손 사내가 그와 같이 눈물짓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와 보조를 맞추며 내 작은 힘을 보태 그와 함께 분투 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험난한 세상 속절없는 세월 앞에 어느날 나의 사내가 한없이 작고 초라해진다면,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힘주어 말할 것이다.



"회색 손 사내여. 울지 마오. 내가 여기 있어요."



회색 손 사내들이 행복하길 빈다.

흘릴 수 없는 눈물은 거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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