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바람 부는 언덕과 나무가 그려진 풍경 그림이 있는 책 표지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책에서 히스클리프라는 인물은 사랑에 배신당했다는 이유로(물론 이것도 오해였지만) 상실에 대한 분노와 모욕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집착의 소용돌이에 매몰된다. 그의 멈출 줄 모르는 일그러진 욕망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세대를 넘어 주변의 모든 생을 파멸로 이끈다.
자신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았던 그의 광기를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꽤 오래 생각했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마치 ’ 내가 지옥에 있으니, 당신들 또한 이 고통의 불길을 영원히 겪어보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사랑의 상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복수라는 감정에 압도되면서 어느 순간 사랑의 본질은 휘발되고, 증오만이 남아 자신의 영혼마저 땔감으로 태워버린 안타까운 인물이라는 것. 그 생각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책을 덮고 나니 자연스럽게 질문이 이어졌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사람을 한없이 무모하게도, 용감하게도 만든다. 내가 알던 나를 뛰어넘는 기분을 들게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랑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 역시 우리가 기획하거나 취사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쓰라린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읽고 있는 여러분도 그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유약한 존재일 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사랑에 상처를 겪은 뒤 사람은 종종 변한다. 그 상처를 거름 삼아 더 깊은 뿌리를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매 순간 손익계산서를 따지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극단적으로는 히스클리프처럼 광기에 눈이 멀어 스스로의 삶을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오래전 그 상처 앞에 속절없이 흔들렸던 나를 떠올렸다.
나에겐 사랑해 마지않던 2년을 사귄 연인이 있었고, 각자 집안의 수저 개수만 모를 뿐 자매처럼 지내던 9년 지기 친구가 있었다. 각자 연애를 하던 우리는 자연스레 커플로 자주 만났고 함께 많은 추억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배신을 상대편 애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믿기지 않은 소식에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민경아, 내가 잘못 들은 거지, 너 이런 애 아니잖아...”
“사실이야, 널 만났던 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고, 네 집에 놀러 갔던 것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였어. 이렇게 된 이상 다시는 이런 전화도, 얼굴 볼일도 없었으면 좋겠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과 무너진 우정 앞에 말문이 막혔다.
“...... 잘 지내라.”
그 마침표 하나로 나는 연인과 절친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 뒤 몰아치는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와 불신은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왜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람을 믿었을까...” 불쑥불쑥 치켜드는 그들의 기만과 모욕감에 치를 떨며 나 자신을 끝으로 몰았다. 그렇게 사람들을 피하며 자책과 분노 속에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키며 어두운 방안을 뒹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빈속에 차가운 알코올을 들이켜다 말고 문득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인간 같지도 않은 그들 때문에 이렇게 망가져야 하는데.”
그 순간 자리를 고쳐 앉았다. 내가 무너진다 한들 그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잘 지내리라는 것을. 이 사건에 종속되어 자신을 책망할수록 결국 남는 것은 나만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 뒤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개를 드는 인간에 대한 혐오를 억지로 누르며, 꾸역꾸역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나일 수 있게 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비관과 부정으로 일관하는 나에게 친구들은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주기도 하고, 책으로 숨어버리는 나를 혼내며 책을 뺐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살갑게 나를 건져 올려준 이들 덕분에, 나는 다시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가질 믿음과 용기를 얻었다. 그렇게 어두운 감정 대신 내 안의 선량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히스클리프는 분노에 매몰되어 허공으로 사라졌지만, 나는 잃어버린 길을 찾아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격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무게의 진심으로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 서글픈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살다 보면 질투가 올라오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어떤 순간에는 마음이 흔들리고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내 본연의 빛을 잃고 그들과 같은 괴물이 되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생에 가장 큰 비극이지 않을까.
다행스러운 사실은 나는 그들처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도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랑은 다시 나를 부지불식간에 시험에 들게 할 것이다. 그 시험대에서 내가 내놓을 대답은 여전히 흔들릴지라도 도망치지 않겠다는 것, 그로 인해 더 깊은 뿌리가 내려지는 것을 마다 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순간의 기록자입니다 : )
겨울 옷들은 서랍 속으로 정리를 하셨을까요? 저는 아직도 한국의 날씨를 믿지 못해 정리의 결단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번 인사를 드릴 때엔 서랍 속으로 말끔히 정리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제 최근 소식을 전해드리면 얼마 전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하늘이 빙빙 도는 어지러움을 느껴 병원을 갔습니다. 의사로부터 약한 이석증 증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빨리 병원을 찾은 탓에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 괜찮아졌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이석증이 왜 걸리는 거냐고 했더니 만병의 근원 스트레스가 들어가더군요.
다른 날 같았으면 "할 말 없으면 다 스트레스지" 라며 비아냥댔을 텐데, 너무 잦은 크고 작은 잔병치레를 겪다 보니 병원을 나오며 생각했습니다. 맨날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드름을 피우지만 정작 내 현실은 스트레스에 취약한 유리멘털 개복치구나 라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개복치가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것처럼 진짜 스트레스에 취약한 물고기 인지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봤는데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닌 와전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찾아본 바에 따르면, 개복치는 한 번에 무려 3억 개 이상의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이는 척추동물 중에 가장 많은 수치라네요. 그에 비해 성체로 자라는 것은 단 몇 마리뿐이라니 척박한 생존환경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개복치는 예민해서 금방 죽는다고 알고 있는데 사실 이는 과장된 면이 있다고 합니다. 엄청난 생존력을 가진 적응의 왕이라고 하네요. 처음 태어날 땐 2~3mm 정도로 아주 작지만 성체가 되면 2000kg까지 약 6000만 배 이상으로 커진다고 합니다. 차가운 심해 약 600m와 따뜻한 수면 위를 오가며 엄청난 수압과 온도를 견디고, 피부 두께는 무려 15cm에 달한다고 합니다. 3억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엄청난 존재로, 성장과정에서 수많은 기생충과 질병에 노출되지만 개복치는 스스로 수면 위를 찾아 햇볕을 쬐며 치유를 하고는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고 해요.
이런 상황이라면 "엄청난 멘털이잖아" 싶었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개복치는 나름의 방어기제를 갖추고 수많은 질병에 노출되지만 스스로 자가 치유를 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해당 내용을 알고 나니 유리멘털 개복치라는 말에 왠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어쩌면 나도 개복치처럼 햇볕을 쬘 필요가 있다는 신호를, 몸이 더 크게 고생하기 전에, 섬세한 감각이 미리 신호를 보내주는 것은 아닐까라고요.
그래서 개복치가 새삼 다르게 보이면서 계속 개복치처럼 나만의 햇볕 쬐기에 관심을 가지자 싶었습니다.
또한 이번 글과도 맥락이 닿아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와 숱한 시험을 합니다. 그 시험 속에서 어떤 사람이 될지는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햇볕 쬐어 다시 깊은 심해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떤 시험을 거치고 있으신가요? 여러분의 햇볕은 충분히 따뜻하신가요?
지난주를 건너뛰고 인사를 드리다 보니 괜히 글이 길어졌습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