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온전한 자유, 느껴보셨나요?
시댁에서 차 타고 10분 거리에 자주 가는 해변이 있다.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선셋 뷰가 아름다운 곳이다. 저녁이면 태양이 지평선으로 서서히 하강하며, 황금빛을 머금은 오렌지-핑크 컬러로 하늘과 바닷물을 현란하게 물들인다. 거기서 해수욕을 즐기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멍을 때리기도 한다. 절벽이 길게 늘어진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하고, 일몰이 시작되면 비치 타월에 앉아 그림 같은 풍경을 감상하는 일상이 나에겐 행운처럼 느껴진다.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코르푸 대부분의 해변은 관광객으로 들끓는다. 이곳 북서부에 자리한 시댁 근처 해변에는, 가족 혹은 커플 단위의 영국계 관광객 혹은 히피 분위기의 독일계 관광객층이 압도적이다. 그들 틈에서 활기찬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나와 짝꿍은 나름 로컬이다. 관광객 틈에 있기 보다는, 보통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해변 가장자리로 깊숙이 들어간다. 절벽이 앞으로 돌출되어 반대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름 은밀한 공간이다. 극 "I"성향인 나에겐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는 곳이다.
하지만, 관광객을 피해 이곳으로 오면, 누드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인공물 하나 없는 해변과 절벽,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남녀가 자연스레 누드로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이브가 사과를 먹지 않은 에덴동산의 모습은 이랬을까. 아니, 에덴비치.
이곳은 '공식적인' 누드 비치는 아니다. 일반 관광객들이 점령한 해변의 한 끝자락일 뿐이다. 하지만 로컬 주민이나, 다른 방문객이나 아무도 불만을 갖거나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없다. 다들 이 모든 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누드 비치'라고 정해진 곳이 아니다 보니, 수영복 차림 혹은 일반 옷차림새의 사람들도 같이 섞여 있다. 벗고 있는 자와 입고 있는 자가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레 융화되어 있다.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벗은 자들만 골라서 보고 있었나 보다. 익숙하지 않는 풍경에서 차분하고 태연하게 앉아 바닷가를 응시하고는 있지만, 마음은 요란하다. 어느새 나는 또다시, 선글라스 안에서 눈알을 굴리며 그들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여느 변태의 얘기가 아니었다.
나의 눈은 왜 자꾸 벗은 자들 쪽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냥 그들이 신기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남들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사실, 아무도 시선을 주거나 신경 쓰고 있지는 않다) 굳이 옷을 벗는 이유가 무엇일까? 평소처럼 한창 사팔이가 되어 그들을 흘끔거리던 나는, 더 이상, 그들을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나 혼자 촌스럽게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용감하게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나의 편견 어린 시선도 벗어버렸다. 내가 자라온 문화적 관점을 내려 놓고, 몸과 머리의 잡음과 궁금증도 정지시켰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열린 가슴으로 본 그들의 모습은, 진정으로 자유로워 보였다. 양팔을 넓게 벌려 살랑거리는 바람을 온몸으로 품고, 몸을 구석구석 감싸며 흐르는 바닷물에 몸을 내맡기고 있다. 남의 시선, 콤플렉스, 고민거리, 번뇌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듯, 이 순간, 이곳, 세상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 보인다.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아름다운 이오니아해 바닷가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렇게 알몸으로 즐기는 수영을 지칭하는 용어도 있다고 한다. "Skinny-dipping". 말 그대로 피부를 직접 물에 담그는 행위이다. 'Skinny-dipping' 을 즐기는 사람들은, 몸을 쓰다듬으며 흐르는 차갑고, 거친 혹은 부드러운 물줄기가 주는 센세이션이 ‘힐링‘ 그 자체라고 한다. 아무 장애물 없이 물과 직접 맞닿은 몸으로 지구와 접신하는 듯한 연결감을 느끼고, 한없는 정신적 자유를 만끽한다. 어떤 이들은, 심장이 뛰고, 아드레날린이 상승하며 강렬히 ‘살아있다’는 느낌의 환희가 차오른다고도 한다. 묵은 스트레스가 싸악 풀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진짜, 이 정도 센세이션이면 누구나 도전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그들처럼 벗어 던지면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을까? 해변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바다가 이쁘다, 하늘이 이쁘다, 즐기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겉으로 관망만 하고 있다. 사실, 나의 의식은 온통 딴 곳으로 향해있다. 비키니만 입어도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자외선에 피부가 상할까 봐, 소금기로 건조해진 얼굴에 주름이 더 늘까 봐 신경 쓰인다. 바닷물에 떡이진 머리가 뒤엉켜 신경 쓰인다. 헤엄치며 지나가던 물고기라 나를 물까 봐 신경 쓰인다. 바닷물 바닥 곳곳에 솟은 바위에 발을 부딪힐까 봐 신경 쓰인다. 이끼나 미끄러운 해조류라도 밟고 미끄러질까 신경 쓰인다. 수영도 제대로 못 하고 팔과 다리만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고, 누군가 저쪽에서 비웃고 있을까 신경 쓰인다. 바다를 온전히 느끼고 자연과 교감하기는커녕, 나는 '온갖 것들‘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건 수영복을 입고, 벗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그들처럼 skinny-dipping을 시도한들(그럴 일은 없겠다만..), 무한한 자유와 환희를 느끼기엔 온갖 생각, 욕망, 갈망, 불안 등의 잡념들이 내면에 무겁게 내리깔려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내면의 무게는 만성이 되어, 이들을 지고 다닌 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벗어내기 조차 버거웠다. 짧은 순간의 알아차림이었다.
그들이 벗어 던진 건 아마도 수영복 조각이 아닌, 그 모든 잡념과 에고였을 것이다. 그들이 즐기는 건 알몸이 아니라, 자연과 현재 그 순간에 온전히 몰입한 ‘내맡김’의 상태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생생한 자각의 상태에서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센세이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맡김'의 상태에 이르러야 순간에 집중하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는 순수한 상태의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과도 같다. 훌훌 벗어던져 버리는 내면적 작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해변의 누디스트들은 잘 알고 있었다.
Jan 2024, Daej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