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올리브 수확과 올리브 방앗간
그리스 이오니아 해, 코르푸 섬은 겨울에도 초록 초록하다. 무성히 자라는 풀, 잡초, 덤불들은 빗물을 흠뻑 들이키며 한층 더 선명한 초록빛을 내뿜는다. 섬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나무들은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이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뾰족뾰족 기다랗게 솟아있고, 올리브 나무들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치고 풍성하게 숱이 많은 잎을 자랑한다.
겨울이 되면 특히, 올리브 나무엔 열매들이 밀도 있게 알알이 매달려 있고, 열매 무게가 버거워진 가지들은 아래로 축 처져있기도 한다. 영글어 가는 올리브 열매는 늦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겨울로 들어가면서 섬 전체는 열매 수확으로 분주해진다.
섬 주민들 대부분은 올리브 나무 몇 그루씩은 소유하고 있다. 텃밭에서 자라는 올리브, 야산에서 거의 정글을 이루며 와일드하게 자라는 올리브, 커다란 대지에 줄 맞춰 심어진 올리브 그로브까지 모양새와 규모는 다양하다. 판매를 목적으로 대량 생산을 하는 전문 올리브 프로듀서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반 주민들이다. 개개인들은 수동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올리브 열매를 수확하여, 동네마다 있는 방앗간에 가서 기름을 짠다. 우리나라 시골에서 참깨 수확하여 방앗간에서 참기름을 짜 먹는 그런 느낌이랄까.
산도 0.8% 미만의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EVOO) 수준의 고퀄을 짜내기 위해서는, 올리브가 아직 여물지 않고 녹색 빛깔일 때, 늦가을쯤 미리 수확에 들어간다. 올리브 수확 시즌이 시작되면 올리브 나무 아래 널찍하게 깔린 검정 그물 넷을 흔히 보게 된다. 어린 녹색의 올리브 열매들은 손 도구를 사용하여 나뭇가지 사이를 머리 빗듯 긁어내거나, 간질간질 살살 흔들면 바닥에 깔린 그물망 위에 떨어진다. 바닥 그물에 떨어진 열매들은 다시 주워 모아야 한다. 또한, 그날 딴 올리브는 그날 바로 기름으로 짜야지 더 신선한 오일을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짧고 굵게 진행되어야 하는 올리브 수확은 제대로 하려면 상당히 노동 집약적이다. 이렇게 올리브 수확은 섬 주민들의 동계 스포츠로 활동으로 통한다.
시댁의 올리브 나무들은 우리가 간 12월엔 이미 거의 수확이 마무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테네의 친척들이 합류하여 아름아름 수확한 올리브로 짜냈다는 신선한 오일이 이미 드럼통으로 여러 개였다. 우리가 갔을 땐 미처 수확되지 못하고 남은 올리브 열매들이 보라색 혹은 검은색으로 여물어 가고 있었다.
이때쯤 되면, 올리브 수확은 기다림과 느림의 미학이 되기도 한다. 가지에 매달린 열매들을 굳이 일부러 떨어뜨리지 않고, 스스로 떨어지도록 기다린다. 아버님으로부터 며칠이고 걸려 바닥에 떨어진 올리브를 주어 모으는 미션을 받았다.
그리하여, 내 인생 처음으로 올리브 수확(?)을 해보게 되었다. 수확이라 해봤자 바닥 그물에 떨어진 영근 올리브 알들을 주워 모으는 것이었다. 거의 바닥을 뒹굴다 시피하며, 옷이 흙, 먼지, 풀잎 등으로 얼룩지는 것도 보람으로 느꼈다. 신이 난 듯, 신들린 듯 열심히 올리브 알들을 주워 모았다. 발견된 보물섬에서 금은보화를 주워 담는 해적처럼, 거의 뒤집힌 눈으로 탐욕스럽게 보라색 알갱이들을 긁어올렸다.
돌아보니, 시아버님과 짝꿍도 열심히다. 이렇게 셋이 모아 실은 올리브가 무려 400kg. 금년 들어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올리브 무더기를 실어서 트럭을 몰고 동네 방앗간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올리브 열매가 가득한 포대 자루를 싣고 방앗간에 가는 차량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12월 중반에도 올리브 방앗간은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한쪽에 차를 대고 실어온 올리브 무더기들을 세척기로 끌고 들어가는 주입기에 쏟아부었다. 올리브알들은 컨베이어를 지나며 같이 딸려온 온갖 나뭇잎, 잔가지, 불순물들이 걸러지고 세척된 후 압착기로 들어간다. 앞서 온 손님들이 많아 '나의' 올리브가 들어간 압착 통은 차례가 되기까지 대기에 들어갔다.
그동안 방앗간 주인아주머니께서 주신 에스프레소 한잔과 쿠키를 들고 앉아 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방앗간 인부들, 오며 가는 다양한 손님들, 즐비하게 차례를 기다리며 놓여있는 올리브유 통들, 굉음을 내며 작동하는 거대한 압착기와 컨베이어, 주인과 같이 왔는지 꼬리 살랑거리며 유유히 돌아다니는 강아지 등 이 모든 풍경에 올리브유의 상큼 구수한 기름 냄새가 서려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어 드디어 압착되고 걸러진 올리브유가 관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약간의 초록색이 감도는 듯한 노란 액체였다. 어릴 적 약수터에 갖고 다니던 커다란 약수통처럼 생긴 통으로 네 통 정도 나왔다.
이렇게 나온 올리브유는 총 50여 킬로, 산도는 2.0이었다. 스스로 여물어 땅에 떨어진 오래된 올리브를 긁어모아 짠 기름 치고는 괜찮은 수준이었다. 흔히 말하는 고퀄리티 엑스트라버진은 아니다. 하지만, 집 마당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알아서' 자라준 순 유기농에, 코르푸 대표 품종인 λιανολιά (Lianolia ; 랴놀랴) 단일 품종으로 짠 기름이다.
지역 주민들은 아로마가 강하고 폴리페놀의 톡 쏘는 맛이 일품인 낮은 산도의 신선한 엑스트라 버진 (EVOO)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들에겐 굽고, 튀기고, 요리하는데 쓰일 일상적인 식용유일 뿐이다. 오히려 완숙된 올리브로 짜서 상업적 가치는 덜 하지만, 향이 강하지 않고, 부드러운 맛의 올리브유를 선호하는 주민들도 많다고 한다.
올해도, 시부모님 창고엔 늦가을에 신선하게 짠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 및 여물어 떨어진 완숙된 올리브를 주어 짠 올리브유가 담긴 드럼통들이 든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한 해 내내 먹을 올리브유 양을 훨씬 넘기기 때문에 주변 친척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팔기도 한다.
흔히 올리브유를 담거나 저장하는 용기는 '테네케스' (τενεκές)라고 하는 철제 통인데, 기본 한 통 단위가 17L이라고 한다. 보통 마트 가면 기름 저장용 빈 철제통을 구매할 수 있다. 여기서는 거래 단위가 올리브유 한 통이라 하면, 보통 17 리터들이 '테네케스' 통이다.
짝꿍 친구가 '테네케스' 하나를 부탁했다. 통 하나를 마트에서 사다가 올리브유를 담고보니, 시골 방앗간에서 짜온 고품질의 진정한 노브랜드 올리브유다.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상업적인 올리브유의 온갖 브랜드와 레이블, 멋진 용기 디자인과 타이틀들이 나에게선 서서히, 희미해져감을 느꼈다.
배달가는 길에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 문득 보니, 자동차에 올리브 열매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다. 길가엔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올리브 열매들과, 누군가의 발에 밟혀 뭉그러진 올리브들이 길을 물들이고 있다. 주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수확한다한들, 수북이 섬을 덮고 있는 올리브 나무들은 계속해서 열매를 맺어내고 떨어뜨린다.
이렇게 코르푸의 겨울은 올리브와 함께 무르익어간다. 눈이 떨어지는 대신, 올리브 나무에서 잘 익은 올리브 열매가 떨어진다. 추위에 웅크리지 않고, 풍요로움에 깨어나는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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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2024 , Cor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