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다 쌌어?"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물어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휴직 직전 마지막 날까지도 일이 정말 많았기에 작정하고 짐을 쌀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큰 그림은 있었으니....
D-4주 : 비우기
작은 집이지만 10년을 살다 보니 짐이 늘고 늘었다. 특히 아이가 태어나고서부터 내 짐보다는 아이짐이 많아졌다. 그래서 싱가포르 짐을 싸기 전에 일단 비우기를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주일 내내 중고거래 사이트에 엄청나게 많은 살림을 올려댔다. 시기가 지난 아이 옷, 잘 가지고 놀지 않는 장난감, 흥미를 잃은 책을 한마탕 정리했다. 그다음은 각종 잡화류를, 그다음은 잘 쓰지 않는 살림류를 정리했다. 처음에는 소소하게 판매 금액을 적었다. 하지만 이내 다 무료 나눔으로 바꾸었더니, 이 물건을 필요로(?)하는 많은 분들께 금방 보내드릴 수 있었다. (음료수 하나, 빵하나, 아이 먹을 간식이라며 츄파춥스를 챙겨주시던 나눔 이웃들이 문득 생각난다.)
깨끗한 옷들은 모두 자선기관에 보내고, 안 보는 책들은 중고서적에 팔았다. 그리고 신혼 때 각자 들고 왔던 캐캐묵은 자료나 문서는 모두 재활용쓰레기로 정리했다. 그리고 나머지 버려야 할 것들은 100리터 쓰레기 봉지에 뒤도 안 돌아보고 넣었다. 점점 집이 비워지기 시작했다. 진즉에 이렇게 비우고 살걸 싶었다.
D-2주 : 사기
비웠으니 사야 할 시기이다. 각종 사이트를 뒤져서 "싱가포르에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을 찾고,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심사숙고해 사들이기를 시작했다. 이 주간에는 하루에도 3-4개씩 쿠팡 비닐포장이 집 앞에 널려있었다. 스트레스가 다시 시작되기 시작했다.
D-1주 : 짐 싸기
대망의 짐 싸기 주간이었다.
이민가방이냐 단프라 박스냐 고민을 하다, 결국 클래식하게 이민가방에 차곡차곡 짐을 쌓았다. 처음에는 무게 생각을 안 하고 각만 잡았다. 하지만 23kg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니, 하나 넣고 무게재고 하나 넣고 무게재고를 반복했다. 헬스가 따로 없었다. 아직도 왼쪽 어깨가 아픈데, 아마 그때 무게 재며 무리가 간 게 아닌가 싶다.
수화물로 붙일 이민가방 4개, 기내에 들고 갈 수 있는 10Kg짜리 3개, 그리고 휴대용 백팩 3개(말이 휴대용이지, 무겁기로 소문난 책은 다 휴대용 가방에 넣었다)를 꼼꼼히 챙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짐의 일부는, 자체 무게제한으로 아직 서울에 있다. 남편이 싱가포르에 올 때 들고 오리라.
짐을 싸다 보니, 25년 전쯤 미국에 처음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 1년 미국 어학연수였다. 미국에 지인도 없고, 주변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간 친구도 없었다. 정말 깡하나로 혼자 이것저것 알아봐 비행기에 오르던 스물두 살의 나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커다란 이민가방 하나와 백팩을 메고 출국을 했던 것 같다. 무슨 짐을 넣어 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어가 잘 안 들려서 환승을 해야 하는 시카고 공항에서 무거운 이민가방을 끌고 터미널 이쪽저쪽을 땀나게 뛰어다녔던 기억만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그 1년 영어를 치열하게 배워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자체 왕따를 시키며 외롭게 지냈던 것 같다. 말도 잘 못하면서 미국친구들 모임에 기웃거리며 스트레스받고, 아르바이트하던 학교 식당에서 싸 온 남은 밥을 다음날 점심으로 해결하고, 노트북도 없어 학교 도서관 컴퓨터를 찾아 부모님께 이메일 안부를 전하고, pre-paid 국제전화 카드로 학교 공중전화에서 한국 시차를 계산해 전화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한 손에는 7살짜리(싱가포르 나이 다섯 살짜리) 아들 손을, 한 손에는 이민가방을 들고 싱가포르로 간다. 갑자기 각오가 남달라 졌다. 잘 살아야 하는 1년이다. 결심을 하고 단단히 가방을 싸는 이 마음으로, 1년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때처럼 너무 빡빡하게는 버티지 말자고 생각했다.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고, 가끔은 사치도 부리고 가끔은 멍도 때리고...
그렇게 짐 싸기가 끝나고, 추운 겨울날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탔다.
<<아래는 혹시 궁금해하실 분을 위한 정보이다. 개인 사정 및 취향에 따라 짐 싸기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주방용품 - 일단 손에 익은 주방용품은 챙겼다. 그릇, 조리도구, 프라이팬, 냄비 등등 용도에 맞게 아들과 내가 쓸 수 있을 만큼만 1-2개씩, 그리고 당장 쓸 것 같은 수세미나 설거지비누, 키친타월, 포일, 랩, 비닐장갑 등은 하나씩, 그리고 락앤락 통 몇 개를 챙겼다.
와서 보니 슈퍼에 웬만한 것은 다 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 내 손에 익은 게 필요한 것 같긴 하다. 밥도 해 먹으려고 쿠쿠도 챙겼다. 오랜만에 먼지를 닦았다. 집에서 쓰던 브리타 정수기와 필터도 들고 와서 도착 당일부터 잘 쓰고 있다.
식재료 - 아이가 어려 김치를 못 먹어서, 김치는 한 포기씩, 친정엄마의 마른반찬, 김이나 미역은 챙겼다. 코인육수 완전 사랑이며, 초반에 가져온 햇반과 라면은 3일 만에 다 탕진했다. 한국 쌀 2kg와 잡곡 1kg는 들고 왔는데, 슬슬 떨어져 가기에 현지쌀을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의외로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신기한 식재료가 많아 힘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육류 반입이 안 돼서, 스팸, 얼린 설렁탕 이런 거 못 들고 온다고 하는데, 지인 말을 들으니 소량은 안 걸린다고는 한다.
생활용품 - 한국 화장지만 한 것이 없다고 해서, 당장 쓸 클리넥스랑 두루마리 화장지 2개씩 챙겼는데, 와서 보니 현지 크리넥스 화장지도 쓸만하다. 물 빠지는 욕실 신발은 필수라 하더니 잘 사가지고 왔다. 각종 청소용품은 동네 잡화점에 많이 있다.
욕실/세탁용품 - 샴푸, 비누, 세탁세제(캡슐 세제) 등은 집에서 쓰던 브랜드로 하나씩 사서 왔다. 현지에서 세제랑 섬유유연제 새로 샀는데 현지 날씨에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수건은 챙겨 왔고, 집 구조 덕에 핸드타월은 이케아에서 샀다.
화장품 - 역시 집에서 쓰던 브랜드로 하나씩 챙겨 왔다. 선크림과 클렌징은 특히 필수이다. 화장을 해 보려고 쓰던 색조화장도 챙겨 왔는데, 땀이 많이 나니 화장도 안 하고 선크림에 립스틱이 다이다.
옷 - 여름옷과 바람막이만 챙겨 왔다. 싱가포르의 겨울은 비 오면 나름 쌀쌀하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다. 아이는 5일 내내 학교 유니폼을 입는다. 수영복은 필수이다.
아이 장난감/책 - 무게제한으로 제일 못 들고 온 것들이다. 장난감은 현지에서 조금 사기도 했고, 남편이 올 때 좀 더 들고 올 참이다. 다행히 학교 도서관이 잘 되어 있어서, 영어책이나 몇몇 한국책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도 있다.
기타 - 근처 잡화점이 다이소보다 더 다양한 물건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문방구, 공구, 멀티탭, 반짇고리, 상비약, 여분 안경 등은 챙겨 오면 좋겠다. Universal socket은 이케아가 아닌 동네 잡화점에 팔았다.
그 외에 식기 건조대, 빨래 건조대, 청소기, 신발장, 자전거 등등은 현지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하지만 배송이 어찌나 느린지, 쿠팡이 너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