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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Aug 05. 2024

기억해 줘. 내 이름은..

올해 3월이었다.

그냥 적당히 휴가를 낼 수 있었던 이른 봄날, 우리 식구는 제주도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숙소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한라산 중턱에 잠깐 오르기도 했었다.

숙소 근처를 산책했고, 남이 차려준 맛있는 조식을 먹었다.

결혼 전 여행은 늘 해외였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제주도가 주는 안락함과 다양성이 늘 우리 가족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짧은 2박 3일의 휴가를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제주 공항에는 탑승 수속을 밟기 전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조그맣게 공항에 마련된 실내 놀이터이다.

놀이터라 해봐야 조촐하다. 비행기 모형에 계단과 미끄럼틀이 전부이지만, 아들은 탑승 수속 전 꼭 들른다.


주말인 그날도 비행기 미끄럼틀은 아이들로 북적북적했다.

약간 소심한 아들은 미끄럼틀에서 놀면서도 엄마를 부르며, 자신이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바로 그때 한 소녀가 나타났다.


찰랑찰랑한 긴 머리카락과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머리띠. 플레어 청스커트와 하얀 블라우스, 그리고 하얀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 정신없이 놀고 있는 남자아이들이나, 비행기 타기 전 특유의 편안한 복장을 여자아이들과는 확연히 눈에 띄게 예쁜 소녀였다.

놀고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는 것을 그녀도 알았는지, 오른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살짝 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포카리스웨트 광고에서나 나올법한 청량함 그 자체였다.

여섯 살 또래나 되어 보이는 그녀는 이 친구 저 친구와 놀다가, 그나마 다른 남자아이들에 비해 얌전히 놀고 있는 우리 아들을 최종 놀이 친구로 선택했다.

안 그래도 그 소녀와 중간중간 노는 것이 재미있었던 우리 아들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와 최선을 다해 술래잡기를 하고, 최선을 다해 함께 미끄럼틀을 탔다. 그녀가 물을 마시면 자기도 물을 마셨고, 자기가 아끼는 젤리를 그녀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보니, 그 소녀의 아빠는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탑승 시간에 늦을 것 같다며 신나게 놀고 있는 그녀를 캐리어가 실려있는 공항 카트에 태웠다. 그녀는 시크하게 그녀의 아빠가 주는 물을 마시며 떠나려 했다. 바로 그 찰나였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기억해 줘!!

내 이름은 겸이야!!!

넌 이름이 뭐니??!!"


놀이 친구를 갑자기 뺏겨버린 우리 아들은 갑자기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다 대고, 그 소녀의 카트 쪽으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큰 아들의 외침은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아들의 외침은 절실하고 애틋했다.

아들의 외침에 그 예쁜 소녀는 처음 공항 놀이터에 등장했던 것처럼, 긴 머리를 오른손으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몰. 라."


예쁜 소녀는 새침하게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아빠와 함께 탑승구로 이동했다.

남겨진 아들은 힘없이 나에게 와서 물을 좀 마시더니, '가자!' 한마디를 남겼다.


몇 살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아시아나 항공을 탄다는 그 소녀는 아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올해 여름에도 제주도를 찾았다.

역시 숙소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숙소 근처를 산책했고, 남이 차려준 맛있는 조식을 먹었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제주 공항에 갔고, 탑승 수속 전 비행기 놀이터를 지나갔다.


"겸아. 여기서 놀다 갈까?"

아들은 놀이터를 한참이나 두리번두리번했다.


"엄마. 없다. 그냥 들어가자"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 예쁜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이제 작은 비행기 놀이터가 재미 없어져서 인지, 아니면 면세점에서 장난감을 사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그냥 놀이터를 지나쳤다.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아들은 지난 3월 간절히 자기 이름을 외쳤고, 끝내 답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아들의 좌절에 다른 희망을 꿈꿔본다.


<제주공항 어린이 실내놀이터. 한국공항공사 제주지역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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