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진도의 들녘은 명절을 앞둔 마지막 오일장처럼 시끌벅적 정신없이 요란스럽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것 같은 누렇게 익은 논들 가운데에서 콤바인(벼를 베는 농기계)이굉음을 내며 논을 비워내고 있고, 콤바인이 뱉어내는 방금 타작해서 말랑한 나락을 받아서 건조기로 가져가기 위해 농로를 내달리는 트럭들이 지나가면 흙먼지를 뿜어대서 저절로 인상이 써진다.
밭에서는 땀냄새 가득했던 여름날을 채웠던 고추나무들을 정리하는 늙은 손이 바쁘고, 심어놓은지 얼마 되지 않은 손바닥만 한 배추들에게는 멀리 냇가에서부터 농수관을 연결해서 올라오는 물이 뿌려지는 스프링클러 소리가여간 바빠 보이는 것이 아니다.
진도는 남쪽 끝에 있는 섬이다 보니 농사방법이 윗 지방과 다르다. 겨울에도 쉬지 않고 이모작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봄과 가을은 늘 수확과 파종을 동시에 하기 때문에 농한기라는 것이 없는 곳이 여기 진도이다.
그 정신없는 틈에서 나는 겨울에 수확하게 될 시금치 씨앗을 밭에 뿌리기로 했다.
시금치를 뿌리기로 한 밭은 지난여름 동안 참깨를 키워낸 밭이다. 비록 긴 장마에 참깨들은 모두 녹아내려 수확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황토와 마사 흙이 섞여있는 좋은 흙을 가진 밭이다. 무언가 밭에 심으려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땅에 퇴비와 석회를 뿌려주고 잡초제거와 보드라운 흙을 만들기 위해서 트랙터(밭과 논의 흙을 가는 농기계)로 몇 번이고 흙을 갈아엎어놓아야 한다.
시금치 씨앗을 다른 씨앗과 다르게 생긴 모양이 삐죽삐죽해서 작은 밤송이 같다. 장갑을 끼고 있어도 가시처럼 생긴 돌기가 콕콕 매섭게 찔러서 파종을 하려면 손가락에 힘을 풀어서 살살 어루만져야 한다. 조심스럽게 시금치 씨앗을 뿌리고 나면 다시 트랙터로 흙을 덮어준 뒤 관리기(밭이나 논에 고랑을 내거나 흙을 덮어주는 등의 일을 하는 작은 경운기 같은 농기계)로 물길을 내주는 것이 시금치 파종의 마무리이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반갑지 않은 풀들과 함께마치 개구리가 곤충을 잡아먹을 때 길게 내미는 혓바닥처럼 길고 못생긴 시금치의 새싹이 거친 흙을 뚫고 삐죽 올라와 앉아있다. 떡잎은 참으로 못생겼지만, 두 번째로 나오는 잎부터는 내가 시금치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지만 트로트 신동이라고 TV에 나와 어른들보다 더 구성진 음색과 간드러짐으로 노래를 뽑아내서 귀엽지만 성숙함이 공존하는 모습이랄까? 그래도 아직은 귀여움이 더 큰 아가 시금치들이 마냥 대견스럽기만 하던 때이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시금치들은 충분히 커주어야 한다. 추위가 오면 크는 속도도 느려지지만, 시금치 맛을 제대로 내려면 그 잎에 가을이라는 계절을 최대한 많이 담아 두어야 처음 만나게 될 겨울을 견뎌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황토흙만 보이던 밭이 시금치 잎들이 커지면서 짙은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
이맘때 시금치 잎이 너무 보들보들해서 벌레들이 쉽게 입을 데고 좁쌀만 한 구멍은 잎이 커갈수록 함께 커간다. 푸르름이 사라져 가는 산속에서 사는 고라니들이 시금치 잎들을 뚝 잘라먹고 사라져서 시금치는 부지런히 잎에 살을 찌우고 새 잎을 키워내야 한다.
서리가 내리고 눈을 맞이한 시금치들은 여리던 잎을 벌레와 고라니를 만나면서 스스로 퉁퉁하게 만들어 이 겨울을 여유롭게 살아내고야 만다. 여리고 여린 마음으로 생각 없이 살던 나는 벌레들이 구멍을 뚫고 고라니가 내 잎을 베어 물었던 날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눈보라 치는 겨울 속에 돋아나 버린 내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차가운 세상이 내 잎을 얼려버리고 내 땅을 얼리고 내 심장 같은 뿌리도 얼려버렸던 매섭던 나의 겨울들이 이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겨우 잎도 더 두껍고 널찍하게 벌려놓은 기분이 든다.
서리와 눈을 함빡 맞은 시금치는 뿌리까지 살짝 데쳐서 약간의 소금과 참기름 몇 방울만 있다면 달큼하면서도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행복한 아삭함으로 농부의 겨울을 든든하게 해 준다.시금치처럼 한층 두꺼워진 내 마음도 누군가에게 이런 달큼함과 행복한 아삭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