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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버드 Apr 07. 2023

취업했다. 때론 현실이 가장 현실감 없다

언론고시 열차, 이번에 내립니다.

네, 지금요?


2020년. 늘 동경만 해오던 언론인 내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던 해. 남들은 평생도 한다는 진로 고민이 한순간에 다 끝나버린 기분이었다. 하늘에서 빛 한 줄기가 내려오는 것 같았다. 명쾌했다. 아, 나 언론인이 되고 싶었구나. 전공은커녕 교양 수업도 들은 적 없지만 늘 마음속에 언론이 있었다. 입시 원서 중 몇 장에 미디어 지망을 조용히 섞었고, 학교에 좋아하는 앵커 선배가 오면 꽃다발을 사들고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학창 시절부터 뉴스는 거의 매일 봤다.


뉴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전면에 보이는 게 앵커고 아나운서였다. 무작정 아나운서 학원들에 방문해 상담 발품을 팔았다. 5군데까지 돌고 나서야 두 번째 방문했던 학원에 등록했다. 상담을 맡은 부원장님은 내 24살 평생 동안 내 이름을 가장 정확히 발음한 사람이었다. 저게 언론인의 전달력이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공부'를 열심히 시키신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내 이름 석자 정확히 발음하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아나운서 준비는 내게 알맞지 않았다. 뉴스가 있는 채널에 취직한 아나운서가 하는 업무, 방송 중 하나가 뉴스인 거다. 다른 방송엔 큰 흥미가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보도 그 자체였다. 그렇게 기자라는 꿈이 선명해졌다. 그런 내 열망을 알아본 부원장님은 방송기자 특강 등록을 권유했다. 무려 내 최애 방송사를 거친 위대한 분.


사실 그맘때 근로지가 퇴근시간이 늦어 항상 지각했고 외할아버지 작고를 겪느라 심적으로 힘들었다. 시기적으로 수업이 커다란 자양분이 되긴 무리였다. 그래도 터닝포인트가 되긴 충분했다.



이듬해 봄, 외할아버지가 계신 현충원을 찾아 처음으로 뭔가를 부탁드렸다. 학교 언론고시반 입실을 위한 마지막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5년의 학교생활 동안 늘 겉돌았다. 애교심은 강했지만 마음 둘 곳은 없었다. 그런 곳이 언론고시반이 되길 바랐다. 학교와 나의 마지막 끈, 최후의 유대감. 더불어 남들 다 듣는다는 언시 수업에 돈을 쓰지 않고 고시반에서 취직까지 가면 더 짜릿할 것 같았다.


운이 따라 합격은 했으나 고난의 연속이었다. 커리큘럼은 '빡셌'다. 근데 난 칼럼과 사설도 구분 못하는 생초짜였다. 신문스터디에서 한 명 몫을 해내는 데까진 몇 달이 걸렸다. 논술은 무엇을 위한 글인지도 감도 못 잡았다. 논술 수업도, 퇴고스터디도 가랑이 찢어가며 쫓아갔지만 따라잡진 못했다. 남들이 쓰길래 좋은 언론사겠거니 자소서를 냈다. 그마저도 따로 저장하지 않아 첫 합소서에 뭐라 썼는지도 모른다.


고시반의 분위기는 메탈릭했다. 따스한 선배가 많았지만(알고 보니 모두가 따스했지만) 취업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거의 매일 보는 사이인 만큼 '불가근불가원'을 지키는 듯했다. 그마저도 미디어 전공자들끼리는 이미 끈끈했다. 여기서도 나는 외로웠다. 실력이 없어 더욱 그랬다.


이제야 알았지만 난 사람에게서 효율을 얻는 사람이었다. 당시에도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그맘때쯤 고시반 지도교수님이 바뀌었다. 실원들 한 명 한 명을 면담하셨다. 면담은 매서웠고, 드높은 교수님은 딱딱했다. 내 앞타임에 면담을 마친 입실 동기와 복도에서 마주쳤다. 눈에 눈물자국이 있었다. 우린 그날 처음으로 말을 섞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역시 사람 느끼는 건 똑같았다. 두 입으로 한 이야기를 하며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그렇게 비빌 언덕이 조금씩 생겨갔다.




적응이 막 되어갈 때쯤 첫 인턴을 시작했다. 인턴계를 쓰고 고시반을 쉴 수 있어 일단 신났다. 처음으로 출퇴근을 하고 세금을 뺀 월급이란 걸 받았던 스물다섯. 더없이 찬란한 시절이었다. 만난 모든 동료가 좋았다. 평생 인연이 되길 바라는 이들이다. 일도 즐거웠다. 사람이 좋으니 더 즐거웠다. 글, 영상, 음성 모든 콘텐츠를 자유롭게 경험했다. 존경하는 선배께 칭찬도 많이 받았다. 전국으로 다닌 출장은 기억 속에 엽서처럼 남아있다.


그래도 계약 연장 겸 승진은 하지 않고 12월 31일 만료일에 퇴사했다. 존경하지 않았던 모 선배와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 고시반은 고향처럼 느껴졌다. 있을 땐 나가고 싶고, 나가면 돌아오고 싶은 요상한 곳. 언론고시는 고됐다. 꼭 날 망치러 온 나의 구원 같았다. 고시반 복귀 후 몇 주간 감을 못 잡다 어느 순간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동료들에게도 인정받는 순간이 많아졌다. 허투루 산 건 아니었다는, 나도 모르는 새 발전하고 있었다는 위안이 느껴졌다.


그해 봄, 첫 기획기사를 썼다. 모 언론에서 개최한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함이었다. 고시반에서 팀을 꾸렸다. 범죄피해자와 그 가족을 조명하겠다는 당찬 포부는 수 밤의 철야작업으로 이어졌다. 인터뷰이를 구하는 것부터가 고행이었다. 그래도 작은 단추나마 하나하나 꿰어갔다. 온오프라인 인터뷰를 따냈고 판례를 조회하러 고양시도 처음 가봤다. 고시반 세미나실의 커다란 테이블은 각종 자료, 인터뷰, 관련 책, 온갖 달달한 간식과 커피로 가득 찼다. 가슴도 벅찼다. 기자의 일을 하고 있었던, 기자의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낀, 보람되고 치열한 순간이었다.


팀원들과 간절함을 나누며 거미줄처럼 끈끈해졌다. 우리 선에서 최선을 다해 구한 소스들로 세 편의 기사를 썼다. 마감일 자정, 켈리 클락슨의 'Stronger'을 반복재생하고 최종 검열을 했다. 23:54 쯤 제출했던 것 같다. 제출을 마친 조장 언니는 출력된 기사를 들고 결국 눈물을 보였다.

_

긏이만 슬픈 걸 어떻하조.

결과는 탈락. 현직 논설위원인 고시반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였다고 피드백해 주셨다. 사례가 가장 중요한 류의 기사인데, 우리 신분으로선 범죄피해자와 그 가족의 속속들이를 취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템과 구성은 아주 좋았다고 평해주셨다.


공치사 좀 하자면 내가 제안한 아이템이었고 발제했을 때 교수님도 인정해 주셨던 꼭지였다.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자질은 되는데 밑천이 없어 실패한 것 같았다. 결과 발표 후 억울해서 울었고, 상금을 네 등분 하면 내게 돌아왔을 몇십만 원을 거머쥐지 못해서 울었다. 어찌 보면 크지도 않은 돈이다.


돌이켜보면 언시도 힘든데 매일 돈으로 스트레스받았다. 참… 취준생은 이래저래 치였다. 가장 쓰린 기억 중 하나다. 그때의 나는 과거도 현실도 미래도 고달팠던 것 같다.


+0)

올해 3월 27일, 한겨레에서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족 10명을 심층 인터뷰한 기획 기사 연재가 시작됐다. 정말 좋은 기사였다. 머리가 띵했다. 이만큼 풀어낼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 기사는 일단 되는 기사였다. 기자가 아니라서 이뤄내지 못한 것 같았다. 한겨레 기자들이 담아낸 케이스들은 너무나도 명징했다. 그들은 '진짜' 기자니까.


그때도, 3월 27일에도,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암튼. 2022년 6월엔 채용연계형 인턴에 최종합격했다. 필기도 제일 잘 썼댔고, 자소서도 좋았댔고, 면접도 잘 봤댔다.


그렇게 기자에 한 발짝 가까워진 회사는… 첫날부터 실망의 연속이었다. 공교롭게도 건강상태마저 최악이었던 시기다. 앞서 공모전 준비를 하던 당시에도 인생 첫 수술과 회복 과정을 거쳤는데, 3월에 백신을 맞은 이후 나타난 증상이 소거되지 않았던 것이다. 수술 내용과는 상관없는 통증이었고 그 원인을 밝혀내는 데 한 달이 더 걸렸다. 너무 아팠다. 회사도 힘든데 거기서 아파하고, 눈치 보며 병원에 가고, 원인을 찾지 못한 와중에 통증을 안고 다시 출근하고, 회사에서는 또 스트레스를 받고, 뭐 그런 굴레였다.


심지어 근무 후반엔 한약으로 투병(?)을 해서 밀가루, 고기, 특히 술을 못 먹는 까탈을 감히 부렸다. 그냥 혼자 먹을 도시락을 싸왔고 저녁 번개는 매번 무시했다. 단체 행동을 중요시 혹은 당연시하는 부서였다. 인턴으로서 근태나 그곳에 어울리는 사회성만 보자면 완전 낙제였다. 그러나 선배들이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줬고, 무엇보다 기사는 정말 열심히 썼다. 보람찬 순간도 많았고 결국 인정도 받았다.


채용 전환 제의, 는 깊은 고민 끝에 받지 않았다. 회사도 건강도 걱정이었지만 당시의 개인사가 5할은 차지했던 것 같다. 6월 셋째 주에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퇴사 나흘 전엔 가까운 어른이 목숨을 스스로 끊으셨다. 입사 후 늘 얼빠진 사람처럼 다녔는데, 얼이 점점 더 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잿빛 폭풍 같았던 세 달을 굳이 정리해 새로운 도약을 하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때 내가 9월부터 기자로 정식 출근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마저 단 한순간도 들지 않았다. 완벽하게 메말라 있었다. 수면장애도 더해졌다.


“해탈한 것 같다.” 곧장 복귀한 고시반에서, 풀린 동공으로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거고 그 자체로 귀한 거야” 따위의 소리를 하는 날 보면 친구들이 걱정 반 농담 반 한 얘기다.


현실 속에서 애써 마주하지 않았던 슬픔들이 두꺼운 방어벽 밑에서 더 강한 진원으로 찾아왔다. 매일 밤만 되면 강아지가 그리워 누운 채로 울었고 그 어른을 함께 잃은 주변사람들을 보며 마음앓이했다. 그러느라 잠은 더 못 잤다.


일도 건강도 사랑도 다 뜻대로 안 되는 게 인생. 뭔가를 바라봤자 뭣하나 싶었다.


근데도 마음껏 힘들어하고 원망하지를 못했다. 온갖 공채가 다 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번 짚자면, 현세의 언론고시는 '주요 언론사 공채 과정'을 통칭하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서류, 상식, 논술/작문/영어 등의 필기, 실무평가, 면접, 적성검사 등 비슷한 요소들로 구성된다. 그게 하필 그때 다 몰렸다. 언시생으로서 수년간 바라온 회사들에 멀쩡한 사람인 척 문을 두드렸다. 매주 뭔가의 전형을 준비해야 했다. 입사에서 일희일비하지 않는 성격인데, 이때 떨어진 두 회사에 대해선 유독 출혈이 있었다.



어떤 탈락까지 마무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을이 보였다. 우울은 사람의 의지를 꺾는다. 꿈을 향한 치열한 공부보다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사랑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거의 매일 학교 가는 길에 샛길로 빠져 자전거를 타고 고시반으로 갔다. 그마저도 느지막이 갔다. 술 마시는 날도 늘었다.


집에서 잔소리를 있는 대로 들었다. 성인으로서 기대하기엔 유치한 '땡깡'인지 모르겠지만... 내 힘듦은 집에서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했다. 현재의 성실성만이 '언론고시생'으로서의 평가지표였다. 부모님이 걱정하고 아무리 매섭게 뭐라 해도 상관없었다. 맘대로 청승을 떨기 시작했다.


+1)

그런데… 10월 29일에… 나와 S는 왜 이태원에 갔을까. 둘 다 핼러윈데이에 이태원은커녕 번화가도 나가 놀아본 적도 없었는데. 사실 그날은 많은 청춘들이 그랬을 테다. 우린 국립중앙박물관인가에서 열렸던 기념행사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이태원으로 자리를 옮긴 거였다. 난 스커트 차림 위에 하얀 가운을 입었고, S는 분홍색 환자복을 입었다. 내 왼손과 S의 오른손을 장난감 수갑으로 연결했다. 컨셉이었다.


이태원에 도착했을 땐 21시경이었다. 이미 밀집한 인파에 관련한 신고가 경찰에 수 차례 들어온 시간이었다. 우린 그놈의 해밀턴 호텔 옆 T자 골목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진심으로 갈비뼈 부러지겠다'며 길 옆 가게로 피신도 했다. 수갑은 끊어진 상태였다. 온몸이 쑤셨다. 겨우 술 한잔을 마시고 우린 두 시간 만에 집으로 갔다. 고시반 작문 과제 마감일이었기 때문이다. 둘 다 마감을 못한 상황이었고. 길 위에 끼여있던 것만 한 시간 반이 넘었다. 집에 와서 한 숨 돌리고 글 좀 쓰려는데,


그날은 속보를 보느라 밤을 새웠다. 끔찍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게 진짜일 리 없어. 모든 인스타 친구의 스토리를 확인했다. 마침 또 이태원에 있었던 J와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안부를 물었고, 전화 통화를 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기억 속의 온갖 지인들이 걱정돼 인스타에서 아이디를 검색해 스토리를 봤다. 그날 내 스토리 조회수도 평소의 두 배였다. 우린 서로를 걱정하고 있었다. 총 세 번 찾은 분향소, 마지막으로 방문한 합동 분향소 액자에 있던 얼굴들 역시 그런 애정 어린 걱정을 받았을 텐데. 우린 그 장소에 같이 있었는데.


분향소에 방문할 때마다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을 보았다. 거의 막내들이었을 거다. 근처 한 골목에서 줄담배를 피며 우는 기자를 보았다. 사회부에서 마와리 돌고 있을 K언니가 걱정돼 자주 안부를 물었다.


마음에 짐이 있었다. 내가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면서 왜 민원전화 한 통 안 넣었을까. 현장에서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고 바꿀 수는 없었을까. 이런 자책을 할 때마다 주위사람 모두가 ‘네가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걸 알지 않느냐’며 위로해 줬지만, 단지 지나가는 위로에만 그쳤다. 참사 전, 참사 당시, 참사 후에 뭐가 문제였는지 최대한 조사했다. 고시반 선생님은 캡틴처럼 우리가 봐야 할 지점을 밝혀주셨다.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대응하며 어떤 언론이 어떻게 보도하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봤다.


그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꾸짖는, 아니 적어도 꼬집는 기사 한 줄도 내지 못하니. 속에서 천불이 일어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이 모든 감정을 감내하다간 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았다.


그제야 알게 됐다. 지금 내 상태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걸, 사실 줄곧 그랬는데 모른 척해왔다는 걸.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더 이상 회피도 어려웠다.


+2)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선생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개인상담받고 싶습니다.”


11월 초. 어떻게 지냈냐는 상담선생님의 물음에 설상가상이었던 한 해를 쏟아냈다. 선생님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고르다 입을 뗐다.

- 최근 감내한 일들이 어떤 일들이었는지 제대로 인지는 하고 계시는 건가 걱정이 돼요.

- 하나만 있어도 큰 일들이, 겹겹이 있었잖아요. 큰 파도가 계속 덮치는 것처럼.

- 말씀대로 지금 많이 불안정해 보여요. KO 당한 선수가 쉬지도 않고 자꾸 비틀비틀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아요.

-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선택적 게으름 속에서도 스스로를 더욱 옥죄고 있었다. 고시반 반장직도 맡고 있었다. 일주일에 수행해야 하는 굵직한 태스크가 8개였다. 거의 주간 과제였다. 그중 반 이상을 밀리거나 못하곤 했다. 그래도 단 하나 정리'할 수가 없었'다. 언시생으로서 이렇게 발은 걸쳐놔야 뭐라도 되는 것 같아서. 취준생이 할 수 있는 감정으로부터의 도피 방법이었다.


근데 정말, 아무렇지 않지 않았다. 상담에서 펑펑 울고 왔다. 원래 자주 울었지만 더 깊은 울음이었다. 매달 묵혀뒀던 씨간장같은 울음들.





이맘때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15명의 제군을 하나하나 모았다. 함께 열심히 책을 읽고, 화목하게 대화하고, 치열하게 술을 마셨다. 확실한 환기구멍이었다. 고시반 친구들은 인생의 초점이 너무 독서모임(술)으로 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숙취에 절어 등장했으니 타당한 염려였다.


그래도 그 시간이 내겐 링거 맞는 시간이었다. 회복을 위해 자전거를 열심히 탔고, 선생님 조언대로 양껏 아파했으며, 책을 많이 읽었고 모임 뒤풀이에 가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도 떠났다.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를 타고, 산과 강을 보고 절과 호텔에 머물렀다. '돈도 시간도 성취도 없는 취준생이 무슨 여행' 같은 핀잔은 잭다니엘 몇 잔에 털어버렸다. 윤도현 노래를 틀고 기형도 시집을 새벽까지 읽었다.

마음에 쏙 들었덬 여행용 헤나.

남의 옷에서 옮겨 붙은 반짝이와 깃털들이 억장을 무너트려서 그저 검은 봉지로 감싸 구석에 박아두었던 이태원에서 입은 스커트와 가운은, 대신 태워 버려 달라고 엄마께 부탁드렸다. 잘 지냈냐는 상투적인 인사들에는 "아닌 것도 같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갑분싸되는 대답에도 솔직해서 좋다며 마주 웃는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아물었다. 월드컵이 준 여운과 교훈도 힘이 됐다.


서둘러 책을 덮듯 마무리 지어버리고 싶었던 2022년도 마침내 끝났다.



새해가 된다고 뭔가가 크게 바뀌길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 낙천적인 생각을 할 기력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3)

그러다 곧바로 연초에, 인생에 기점이 될 사건을 겪어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다. 한 두세 달만 쉬게 둘 순 없나? 하여간 나쁜 일은 몰아서 온댔는데 그렇게 겪고도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하여간 몸과 마음을 다쳤다. 이번에 다친 마음은 꽤나 어둡고 삐딱하게 상처를 파고 들어갔다. 거기에 최근 자유주의(?) 언시생의 행태를 못마땅해하던 부모님과의 갈등도 매듭 지을 필요성을 느꼈다.


가족과 대화를 한 이후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독립 절대절대절대 안돼‘ 주의였던 부모님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한 발 물러났다. 나만의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집 구하기도 부모님이 도와주셨다. 보증금까지만.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내게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어느 정도 공감하고 계셨던 거다. 아무래도, 부모니까.


경제적 독립은 선언부터 해놨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인지, 믿을 구석이 없어야 동력이 더 강해진대서인지 독립 후 2주 만에 일이 잡혔다. 평소 좋게 생각하던 언론의 객원기자가 됐다. 이제 월세 내고, 어느 정도 먹고 지낼 수준의 소득은 보장이 됐다. 무엇보다 (인턴이 아닌) 기자가 됐다, 프리랜서지만. 그러고 나니 다시 의지가 타올랐다. 훌륭한 자취생이자 언시생이 되리라. 기사 쓰는 거 정말 보람되잖아. 공채 시즌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도 해소됐다. 스트레스 요인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거나, 내가 사라지게 했거나, 매듭을 같이 잘 풀었다.



최고의 선택이 어딨나, 선택을 최선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한 거지. 근데 그 노력을 하기 위해선 몸과 마음이 편해야 한다.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마음이 편해지니 일도 뭐도 다 잘 된 것 같았다. 좋은 인연들도 들어왔다.


취업도 그렇게 찾아왔다.

어느 화요일 오전 11시경에 전화가 한 통 왔다. 그리고 나는 2주 내로 세 번의 입사 평가를 받았다.

기자가 됐다. 생각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무항산 무항심. 이제 새내기 자취생의 최후 걱정이었던 경제적 영역도 (대출을 받지 않는 이상) 날 괴롭히지 않겠구나.


마음이 놓였다. 내게 안정된 미래, 꿈꿔온 갈래의 일이 주어졌다는 거,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 버텨줬다는 게 마법 같았다. 이러려고 그렇게 힘들었나. 매주 대여섯개씩 하던 스터디도 이제 끝이다.



저 이번에 내려요.


내리려고 탄 열차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안에서 너무 견고한 삶을 겪었다.

내리려고 벨은 눌렀는데…이 고생길이 삶이었기에, 이 안에서 꽃이 피고 낙엽이 졌고, 이들과 함께 울고 욕하고 한숨 쉬고 그러나 자주 깔깔대고 포옹했기에. 자주 쓰렸고 그만큼 의지했기에. 일단 끝이라는 걸 낸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잊고 있었다.


부디 이 끝은 시작으로 연장되길. 내겐 사람이 전부였으므로.

중요한 건 녹지 않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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