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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버드 Apr 13. 2023

누가 정치적이라고요?

전 추모하기 바쁩니다만

"누구야? 좀 정치적인 분 같네" 매년 4월 16일이 되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노란 리본으로 바꾼다. Remember 20140416. 그런 내 프로필을 보고 있는 지인의 옆에서 친구가 한 말이란다. 정의당 리본(?)도 아니고 세월호 추모 리본인데. 어떤 추모는 누군가에겐 정치적 의사표현으로 보인다.

 

2014년 4월 16일은 내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던 날이었다. 97년생 동갑내기 단원고 학생을 비롯해 304명의 동료 시민을 잃은 날.


그날 이후 매일 뉴스를 봤다. 실종자 수색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맘 때 팽목항에 비가 엄청 왔다. 하늘도 슬픔을 주체 못 하는 것 같았다. 바다를 향해 실종자의 이름을 부르짖는 가족들의 눈물에 빗물이 섞였다. 민간 구조작업자들과 다람쥐택시 기사들, 현장 기자들과 스튜디오 아나운서들, 티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국민들 모두 참 많이도 울었다. 세상이 온통 노란색이었다. 어딜 가도 추모 리본이 가득했다.


'세월호'는 이제 아무 데서나 꺼내기는 힘든 고유명사가 됐다. 정치 사안으로 번져서다. 선거 유세에도 이용당했다. 이제 때에 따라선 금기어 취급마저 받는다. 참사 원인과 책임자는 비교적 명징했으나 지금 남은 건 '사라진 7시간', 각자의 마음속에 남은 다른 여운, 이를 촉발한 온갖 정치적 간섭들이다. 유족들은 아직도 진상규명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애도하던 게 고작 9년 전이다.


사회적 죽음은 변질되기 쉽다. 규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책임이 따른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정치적 영역으로 번진다. 어느 기관을 잘못했다고 하고 누구의 목을 쳐낼 것인가. 여론은 어떨까(여론을 신경 쓸까, 말까).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진영 싸움과 네거티브가 오간다.


중심부의 핵심 역할이 왜곡되거나 지워질 수 있어 위험하다. 사회적 죽음은, 국가와 사회의 결함 혹은 낙후가 드러난 것이다. 반복될 경우 안전은 물론 사회 전반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으스러진 삶을 애도하고 그 순간의 진상을 밝히며, 제 역할을 못한 책임자를 처벌하며 재발 방지를 강구하는 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응당 가져야 할 윤리 의식이다. 누군가에겐 의무다.


누가 또 죽었는가, 이유는 무엇인가. 행정안전망이 붕괴돼서 길 위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간 분리조처가 이뤄지지 않아서, 부모의 학대로, 작업환경이 열악해서, 배가 부실증축되고 관제센터 근무자와 해경과 선원들이 직업적 사명을 다하지 않아서... 죽음 후엔 무슨 조치가 이뤄졌고 누가 어떤 책임을 졌는가. 그런 책임엔 어떠한 의미가 담겼는가.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치 사회적인 역할이 적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감시하는 건 언론과 시민이다.


그래서 매년 기억하자고 같은 사진을 자꾸 올리는 거다. 그날 나만 황망했던가.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며 혀 몇 번 차고 넘긴 후 지겨워 '죽겠다'고 하소연했나?



고등학교 때 꽤 가까웠던 친구 한 명은 그랬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론 만나지 않았다. 나와 전혀 다른 가치관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 같았다. 비슷한 이유로 한 명 더 손절했다. 그는 국가적 추모를 위해 체육대회가 취소됐을 때 거의 방방 뛰며 선생님께 따졌다. 세월호 생존자들이 우리와 같이 고3이 됐을 땐 그들의 정원 외 입학제도에 '공정 담론'을 끌고 왔다. 참사는 유감이지만 (자신의 자리를 빼앗고!) 대학에 간다며 분개했다. "정원 '외' 입학이라니까?" 몇 번을 말했다, 지쳤다. 아직 마음 아픈데 추모만 하기도 힘들군.


그래서 사회적 죽음은,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보다 인간관계에서 조심스러워지는 주제가 되기 쉽다. 유감이다.


안 그러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치권과 시민 모두. 추모는 추모의 영역으로 남겨야 한다. 분열 방지와 통합에는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사망한 지 167일이 지났다. 오늘 밤에도 이태원 참사 유족들은 비밀번호도 모르는 고인의 휴대전화를 충전할 것이다. “풀리지 않은 게 있어서.” 아직까지 아무도 사과하거나 책임지지 않았다는 게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재난안전체계와 경찰·소방 지휘라인 끝에 있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휘부실 책임을 지기는커녕 ‘범정부 TF’ 단장까지 맡았다. 대통령은 수고했다며 그를 격려했다. 세월호 침몰,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와 같은 대형 참사 후에는 주무장관이나 유책기관 수장이 물러났다. 도의적으로, 정치적 책임을 대통령 대신 진 거다. 지금 성난 민심과 유족의 답답함은 누가 풀어주나.



다만 애도는 그 자체로만 볼 필요가 있다. 작년 5월 18일 대통령과 여권이 광주에 내려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합창이 아닌) 제창했다. 대통령은 이태원 참사 후 여러 추모식에 자리했다. 민심 통합 같은 정치적 잇속을 끄집어낼 수야 있겠지만, 굳이 삐딱하게 보려는 일부 시선들은 부적절하다. 비판받을 지점은 애도에 있지 않다. 정치를 자꾸 섞으면 갈등이 한도 끝도 없이 벌어진다.


세월호 9주기다. 곧 강산도 한 번 변한다는 시간이다. 크게 변한 건 없다. 어떤 지점에선 역행하는 것도 같다. 이러니 정치권에서 참사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는 거고, 죽음에 대한 기억이 정치로 덮인다. 세월호 참사가 범국민에 남긴 묵직한 비통과 교훈을 잊지 말자. 국가적 참사가 또 다른 정치사건으로 기억되는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정치는 눈물을 닦는 데에만 사용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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